조승현 목사님이 언급한 본글: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막 11:12-1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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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9 19:29:06
2.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1:12-14]

<비교: 마 21:18-19 전반>

이 복잡하고1) 난해한 단화는 예수께서 고난주간에 예루살렘이나 그 부근에서 행하신 유일한 기적인데, 또한 파괴 또는 저주의 기적이라는 점에서도 유일한 것이다(E. Schweizer, F. C. Grant).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평소의 예수님의 성격이나 기적 행위2)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다. 더욱이, 13절의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와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도 있다. 또, 일반적으로 유월절의 계절에 먹을 만한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이 전승의 역사성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고, 또는 여기에 놓여질 것이 아니라 계절적으로 훨씬 뒤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기적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위에 제시한 견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에 기초한 것인데, 전승의 과정에서 사실처럼 와전된 것이다. 한 예로, 불트만(R. Bultmann)은 이 전능은 호세아 9:10, 16, 미가 7:1의 비유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3)

헌터(A. M. Hunter)는 “다른 자료들에서 얻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예수님이 결실기보다 이 내지 삼 개월이나 전에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해서, 그 나무가 말라죽게끔 능력을 행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4) 그러나 山口 昇은 “21절의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라고 하는 기술은 이것이 베드로의 추억에 기초하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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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黑崎幸吉, 이상근, 마경일.
2) A. M. Hunter는 복음서들의 이야기 중에서 매우 복잡한 것 중 하나라고 한다(in R. Earle).
3) in 山口 昇.
4)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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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준다.”라고 하였다. 무화과 열매에 관한 문제는 13절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2) 만손(T. W. Manson)은 이 사건을 유월절의 계절이 아니라, 가을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가을에는 잎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하며, 따라서 남은 열매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으나, 베드로는 그 말씀을 14절의 기술과 같은 의미로 수취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한 의미는 “이제부터 아무도 네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결국 예수님은 내년의 열매가 여는 계절 이전에 종말의 주의 날,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가 온다고 하는 뜻), 혹은 “사람은 이제부터 네 열매를 먹지 않게 될 것이다”(필경 예수님은 내년의 열매가 여는 계절 이전에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는 뜻)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을 [곧]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었으므로, 이튿날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말라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이것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셨기 때문에 마른 것으로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1)

그러나 山口 昇은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기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노력의 발로이지만, 이 사건이 가을에 일어났다고 하는 전제 자체에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흥미 있는 추측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무성했던 잎들이 하루 사이에 다 떨어졌다든가, 제자들의 착각이라든가 하는 설명은 납득할 수 없다.

바르츠(Bartsch)와 쉥크(Schenk)는 마르코 이전의 본문을 13절과 14절a에 한정된 것으로 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은 시장함을 느꼈다가 실망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 앞에서 무화과 열매가 열리기 전에(Bartsch: 약 8주 안에)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되리라는 묵시문학적인 말을 했다는 것이다. 편자는 납득할 만한 이유에서 이런 임박한 기대의 예고로부터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만들어냈으며, 원래 무화과나무는 예수가 예언의 말씀을 하게 된 계기였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그닐카(J. Gnilka, 하권, p. 166)는 “예수가 그 나무에서 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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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2) in J. Gnilka, 하권, p.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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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열매를 찾지 못하고 잎사귀만 보았다는 언급을 추측된 묵시문학적 로기온과 연결시키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 언급은 예수의 시장함과 직접 연결되어 저주의 말씀을 도입하는 데 적절하다.”라고 하였다.

(3) 무화과는 3월말이나 4월 초순에 잎을 내기 시작해서 6월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무화과의 때가 아닌 유월절의 계절, 즉 4월 중순경일 것이다. 따라서 그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하여, 말라버리게 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부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얼레(R. Earle)는 “6월까지는 유용하지는 않지만, 이른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가끔 녹색 무화과가 나타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콜(R. A. Cole)은 “주께서 수확 전의 잎이 무성한 채로 일찍 익은 작은 열매를 구했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버딕(D. W. Burdick)은 “경우에 따라서는 익은 열매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이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했으므로, 사람들에게 열매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다.1)

(4)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행하신 기적으로 행동적 비유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즉, 예수님이 공복의 기회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실 목적으로 무화과의 계절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아시면서 열매를 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적 행위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한 것이었다(사 20:1-6, 렘 13:1-11, 19:1-13, 겔 3:1-11, 4:1-15, 호 1:1-3). 요는, 말라죽은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에 임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교권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7:6). 그것은 마치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것이다.2)

(5) 山口 昇은 “데라는 (4)설을 반대한다. 만일 상징적 행위라고 본다면, 12절의 ‘시장하신지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13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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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Henry, J. A. Bengel, E. P. Gould, E. Bickersteth.
2) E. Schweizer, “Victor”(in W. L. Lane), W. Barclay, C. E. G. Swift, R. A. Cole. F. C. Grant, E. P. Gould, R. Earle, “굴트, 스위트, 존손”(in 山 口 昇), W. W. Wessel, 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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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는 말씀과의 조화, 게다가 22절의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명령과의 문제가 남는다. 그리하여 시장함을 면하기 위하여 열매를 구하셨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이 무엇이었든 간에 마가는 예수의 힘 있는 이적을 묘사하려는 것이라고 데라는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부란스감도 행위에 의한 비유라고 하는 것 같은 견해는, 본문의 어떠한 말에서도 지지되지 않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결국 사실이 무엇이었는가는 이와 같은 단편적인 전승에 의하여는 알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단화는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예수께서 무의미한 기적을 행하실 리가 없다는 점 때문에 행동적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이 단화는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허기를 면하시기 위해 열매가 있음직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다가 실망하셨는데, 이를 계기로 열매 없는 유대인들, 특히 교권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깨우치시기 위해 그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참조: 렘 8:13, 29:17).

마가는 이 기사를【12】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로 시작한다.

이튿날은 테 에파위리온(τῇἐπάυριον)이며, 이튿날 새벽, 즉 고난주간의 둘째 날인 월요일 새벽(니산월<4월> 11일)을 가리키는 것이다(마 21:28).1)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밤에는 다시 베다니로 오시는 것은 마지막 주간(고난주간)의 습관이셨다(E. P. Gould, A. E. Sanner).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는 그분의 인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며,2) 또 지난밤에 야외에서 금식하고 기도하셨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E. Bickersteth, 마경일).

그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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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D. W. Burdick, R. Earle, 黑崎幸吉, 이상근, 마경일.
2) E. Bickersteth, W. Hendriksen, 黑崎幸吉, 마경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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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고 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지만, 잎이 무성했으므로 허기를 면할까 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가서 보신 것이다. 그 이유는 “조금 이른 무화과는 잎과 동시에 맺기 시작하며, 때로는 잎보다 먼저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W. Hendriksen). 그러나 그 나무는 기대와는 달리 열매가 전혀 없었다. 적이 실망하신 예수님은 그 현상을 통해 종교적 내용이 없는 종교적 형식주의자요 위선자가 되어 버린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교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허기보다는 교권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기적을 행해서 그들을 깨우치려고 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14】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라고 하였다.

이 저주 선언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권한이 있으신 만유의 주(행 10:36, 고전 15:28)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기대와 요구에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징벌하신 것도 아니다. 이 저주 선언은 번지르르하게 공론만 무성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인식할 영적 지각이 없는 유대교인들, 특히 교권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또한, “존재 의미를 잃은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는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나타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를 그만두었음을 상징한다. 이로써 개별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종결된다”(J. Gnilka, 하권, p. 163).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는 단순한 들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행동적 비유의 속뜻을 알아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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