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창 목사님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주석에 대한 다른 해석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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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9 09:00:00
본문 : (막11: 12-14, 20-22)
참조 본문 : (마21: 18-19) (마 24: 32-36)

먼저 최세창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주석을 제 글의 펼침에 큰 도움의 디딤돌로 삼고자 허락 없이 제 글에 앞서 먼저 좀 간추려 올리는 바이오니 양해 해 주시길 바랍니다.

*** 최세창 목사님의 주석 ***

이 복잡하고1) 난해한 단화는 예수께서 고난주간에 예루살렘이나 그 부근에서 행하신 유일한 기적인데, 또한 파괴 또는 저주의 기적이라는 점에서도 유일한 것이다(E. Schweizer,  Grant).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평소의 예수님의 성격이나 기적 행위2)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다. 더욱이 13절의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와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도 있다. 또, 일반적으로 유월절의 계절에 먹을 만한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이 전승의 역사성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고, 또는 여기에 놓여질 것이 아니라 계절적으로 훨씬 뒤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기적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위에 제시한 견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에 기초한 것인데, 전승의 과정에서 사실처럼 와전된 것이다. 불트만(R. Bultmann),헌터(A. M. Hunter)

(2) 이 사건이 가을에 일어났다고 하는 전제 즉, 제자들의 착각이라는 설명이다. 만손(T. W. Manson)

(3)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되리라는 묵시문학적인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바르츠(Bartsch)와 쉥크(Schenk)

(4) 6월까지는 유용하지는 않지만, 이른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익은 열매가 있을 수도 있다. 얼레(R. Earle), 콜(R. A. Cole), 버딕(D. W. Burdick), 핸드릭슨((W. Hendriksen).

(5)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행하신 기적으로 행동적 비유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즉, 예수님이 공복의 기회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실 목적으로 무화과의 계절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아시면서 열매를 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적 행위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한 것이었다(사 20:1-6, 렘 13:1-11, 19:1-13, 겔 3:1-11, 4:1-15, 호 1:1-3). 요는, 말라죽은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에 임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교권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7:6). 그것은 마치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6) 만일 상징적 행위라고 본다면, 12절의 ‘시장하신지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13절의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는 말씀과의 조화, 게다가 22절의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명령과의 문제가 남는다. 데라(山口 昇).

(7) 최목사님의 종합적 주석

   이 단화는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예수께서 무의미한 기적을 행하실 리가 없다는 점 때문에 행동적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허기를 면하시기 위해 열매가 있음직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다가 실망하셨는데, 이를 계기로 열매 없는 유대인들, 특히 교권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깨우치시기 위해 그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참조: 렘 8:13, 29:17).

   조금 이른 무화과는 잎과 동시에 맺기 시작하며, 때로는 잎보다 먼저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기대와는 달리 열매가 전혀 없었다. 적이 실망하신 예수님은 그 현상을 통해 종교적 내용이 없는 종교적 형식주의자요 위선자가 되어 버린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교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허기보다는 교권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기적을 행해서 그들을 깨우치려고 하셨다. 이 저주 선언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권한이 있으신 만유의 주(행 10:36, 고전 15:28)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기대와 요구에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징벌하신 것도 아니다. 이 저주 선언은 번지르르하게 공론만 무성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인식할 영적 지각이 없는 유대교인들, 특히 교권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또한, “존재 의미를 잃은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는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나타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를 그만두었음을 상징한다. 이로써 개별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종결된다”(J. Gnilka, 하권, p. 163).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는 단순한 들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행동적 비유의 속뜻을 알아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본인의 다른 해석 ***

  1) 이 저주 선포 단화를 통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종교적 내용이 없는 종교적 형식주의자요 공론만 무성하여 위선자가 되어 버린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교권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상징적 행동으로만 보는 것은 지극히 표면적이어서 보다 깊은 성경의 의도를 잘 짚어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교훈과 은혜의 본문이라면 아주 약간의 유익만 줄 뿐, 보다 깊은 비유의 의미라고 주장하기에는 아무래도 미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 그 이유는 이러한 단순한 해석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우선 본문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요소들이(시장기, 때가 아님이라, 예수님답지 않으신 저주, 말미에 갑자기 믿음과 기도를 연결시키는 언급 등) 많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에 대한 단순한 심판, 경고적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주위 제자 모두뿐 아니라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를 다 어리둥절하게 만들면서까지 이런 비상식적 행동을 통해 굳이 말씀하실 리 없다고 본다. ‘이 위선의 사람들아 회개하라’ 직접 외치면 될 것을 이처럼 애매모호하게 무화과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겠는가?

  3) 전지전능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고작 자신의 시장기 때문에 그런 저주를 내리셨다고 믿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시장기’는 단순히 우리네 경우처럼 육적 배고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영혼 찾기(구원시킴)가 그 분의 식량이요(요 4: 31-38, 특별히 34절), 그의 시장기는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가지게 되는 영혼에 대한 갈증이라고 할 수 있다.(마 5: 3,6)

  4) 다음으로, 그렇다면 주님이 그런 ‘시장기’를 갖고 다가선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좁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할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하며 더 넓게는 구원받아야할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마다 직접 찾아가신다. 각자에게 구원을 주시고자하시는 지극히 큰 목마름과 허기를 느끼시며 먼저 다가가시는 이른바 하나님의 ‘선행은총’이시다.

  5) 또, 무화과 열매가 없었던 이유는 저자가 간결하게 지적하듯이(13절)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즉 제철 과일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출신이며 거기서 자라오신 예수님이 지혜가 없어서 그 열매를 바라며 다가섰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럼 무엇을 나타내는 상징의 행동 즉, 퍼포먼스였을까? 무화과 열매가 선한 행실을 의미 한다기 보다는 바로 각 개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 즉, ‘구원’의 요청에 대한 수용을 의미한다고 연결할 때 모든 본문의 의미가 더욱 확연해 질 수 있다.

  6)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음을 이미 익히 다 아시고 다가서신 주님이셨다. 동시에 열매가 그 나무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과 그 해결책으로 자신의 방법(연합과 믿음)을 주시려고 긍휼과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이다.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말도 안돼! 때가 지금 어느 때인데, 상식적으로도 안 맞아...”였지만 그 분의 다가서심을 받아들이고(먼저 구원을 받고)(엡 2: 8) 그 분과 연합하여 열매를 맺어가는(구원을 이루어가는)(빌 2: 12)는 것이었다.

  7) 모든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눅 18: 27; 막 10: 27), 무화과나무에게 있어서도 그 때는 아직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시기였지만 다가오셔서 열매를 요구하신 예수님의 요청을 무화과나무는 ‘아멘’으로 열매를 내었어야했던 것이다.(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라. 보다 가시적인 예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려 보라. 이외에도 수없이 성경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말씀이 믿음으로 실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8) 이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의 실수는 바로 세상 상식만 가지고 전능하신 예수님의 요청을 거부한 데에 있다. 때문에 불행히도 그 나무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일진대(히 11: 1) 그 믿음을 갖지 못한 ‘불신자’ 나아가 ‘사단의 세력’을 대표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인 이른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가 아니던가? 그래서 말라(생명을 잃고)버려  죽음(영벌)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9) 그렇다면 이 무화과 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구원(더 자세히는 1차적 칭의의 구원)은 각 사람에게 오시는 전격적인 하나님의 은혜(선행은총)에 의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 은혜에 부합한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구원의 열매를 이루어 가는(2차적 성화, 성결의 과정)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산이 들려서 바다로 던져지는 것도 믿음으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더 크고 놀라운 것 즉,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의 성취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본문의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배울 수 있다는 내용이며(마: 24: 32-36)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라는 것이다.(막 11: 23-24, 마 21:21-22)

  10) 따라서 이 본문의 결론적 교훈은 당시 유대인들이나 교권자들에 대한 ‘열매 없는 위선적 삶에 대한 경고’라기 보다는 구원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이에 ‘아멘’으로 받게 되는 구원 그리고 믿음과 기도로써 주님과 연합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얻게 됨을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말하고자 하신 우리 주님의 비유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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