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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과 신자유주의의 결탁
허태수
- 2351
- 2012-07-20 20:46:37
1.1962년에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이는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그 책에서 그는, ‘국가가 그 어떤 개입도 하지 말아야 경제는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며, 각종 규제(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노동자 보호, 사회 보장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고 모두를 가난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밀턴 프리드먼, 심준보.변동열 역/청어람 미디어) 물론, 당시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휩쓸면서
화폐를 생존의 기본으로 하는 모든 영역에 고루 그 뿌리를 내렸다. 여기, 이미 산업자본에 편승한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2.신자유주의로 표방되는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고 광범위하다. 신자유주의란 자본가의 자유, 그러니까 결국은 자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이념이다.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은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본 성장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혹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의 성장이지 결코 인간의 행복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자본의 성장이 우리 인간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해 “빵이 커지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주저하지 않았다.
3.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빵이 커져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지금 빵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작은 빵(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그게 진정한 사랑이요 진리란 이야기를 설교해대는 교회조차도, 이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성공주의’, ‘성장주의’, ‘부흥주의’라는 어리석은 가치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내건 경쟁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생존경쟁이란 콜로세움에 뛰어들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용케 승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한 일이다. 이제는 빵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틈도, 그리고 빵을 나누자고 주장할 여력도 없다. 그저 검투 경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명령에 충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고민하는 것도 일종의 사치일지 모를 일이다.
4.지금, 그 사치스런 고민 끝에 ‘세습’이 걸려 있지 않은가? 마치 다 낡아빠진 끝 가을날의 거미줄에 걸린 숨 끊어진 잠자리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들의 어지러운 논구와 방향 없는 주장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기만 때문일 수도, 아니면 우리의 무지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결국 생존도 버거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신 이외의 타인의 삶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꿈꿀 리 만무하다. 바로 이럴 때 파시즘의 유혹이 시작된다. 스스로 공동체의 미래를 꿈꿀 여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 꿈을 꾸어주면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뤄주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이것이 파시즘이다.
5.생존이 위태로운 사람들 중 그 누가 이런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니 타인의 힘으로라도 구원받으려는 것은 당연한 반응 아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던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복음에 열광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대안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다. 세상은 그가 안철수라고도 하고, 박근혜 라고도 한다. 그것은 종교집단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폐해들을 지난 4년간, 낡은 제도와 ‘대안적 인물’론에 말려들어 온갖 지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그 때 일어난 일들의 틈틈에서 우리는 파시즘을 목도하기도 했다. 때로 세상은 그걸 지도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속임수다.
6.몸이 약해지면 정신이 혼미해 지듯이, 기독교는 지금 혼미하다. 몸은 물질에 휘둘려 이미 약해 질대로 약해졌고, 몸을 밀고 가야할 정신은 늦봄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목련의 꽃잎과 같다. 그리스도적 희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뜻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뉴파시즘의 정치적 예증이 북한이고, 경제적 실증이 제3세계 이며, 그 종교적 현장이 ‘세습’이다. ‘지금은 나눌 마음이 없음’그게 [세습]이다.
따라서 [세습]에 대한 불가성의 원천을 계약법, 신명기법, 레위기법, 종교역사 속에서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21세기의 키워드인 신자유주의의 ‘뉴파시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