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직을 매매한 목사들의 명단공개

김명섭
  • 3290
  • 2012-07-24 09:00:00
0. 교회세습에 대한 네 번째 논쟁

“세습자체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세습목사다> 라는 제목의 글로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다. 필자의 견해에 대한 많은 댓글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본래의 논지에 충실하고자 댓글을 자제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댓글에 간단히 언급한다면, 애초 대승적인 화합을 위한 필자의 제안을 첨예한 세습논쟁으로 전환시킨 김성국목사님의 주장은 ‘기본적 자기귀의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에 해당한다. 또한, \\'세습...모두...개나발\\' 운운했던 성모목사님의 주장은 ‘일반화의 오류’(Error of the Generality)의 전형이다. 송창섭목사님의 ‘물타기’라는 반론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 필자의 물타기(?)는 ‘교회세습’이라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하기 위한 방법론임을 거듭 밝히면서, 계속해서 ‘교회세습의 불공정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될 때까지’


1. 영성의 문제와 자질의 문제

오세영목사님은 세습을 반대하는 이유로 ‘세습담임자의 경우는 영성부재와 목회적 자질 등이 특혜에 의한 선임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 깊이 동감하면서도, 여전히 반문할 수 밖에 없다. 과연, \\'목회자의 자질문제\\'가 교회세습목회자들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인가? 사실 목회자의 자질과 영성의 문제는 나 자신을 포함한 한국교회 목회자 전체의 반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종교사회학자들은 미국교회가 쇠퇴하고 지도력을 상실한 원인 가운데, 목회자의 자질문제를 첫 번째로 꼽는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의 자질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지경이다. 비근한 예로, 필자의 모교인 감신대의 학력수준은 ‘한성대 야간학부 수준’이라는 어떤 교수님의 진언을 들었다. 감리교계통의 다른 신학교 학생들의 학력수준은 더 말할 필요를 못느낀다.

물론 목회자의 자질은 ‘학력이 아니라 영력’이고, ‘지성이 아니라 영성’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학력과 지성이 저하된 감리교목회자들은 영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말씀과 기도’에는 과연 능통할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감리교목회자들의 영성은 ‘능통’ 보다 ‘깡통’에 가깝다. 이와 달리, 광나루근처에서 청년목회를 감당하던 시절 경험했던 장신대학원생들의 경우 놀라울 만큼 성경에 탁월했다. 이러한 현상은 목회현장에고 그대로 이어져서 장로교목회자들은 성경말씀에 중심을 두는 강해설교를 하는 반면 대부분의 감리교목회자들은 주제 중심의 예화설교에 치중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은 신앙의 본질과 영성보다는 오직 교회성장을 위한 방법론에 열중하는 모양새다.


2.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일반적으로 고난과 영성은 비례하고, 풍요는 거룩함에 반비례한다. 하지만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듯이 여기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대개 부요하면 교만하고 가난하면 겸손하겠지만, 나는 부요한 가운데 물처럼 겸손한 이들도 보았고,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태산보다 거만한 이들도 보았다. 과연, 대형교회는 ‘모두’ 불건전하고, 작은교회는 ‘모두’ 건전하다는 일반화가 가능할까? 나는 현실에서 정반대의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실제로 대형교회와 소위 교회세습을 한 목회자 가운데서도 겸손과 신실을 겸비한 충실한 목회자를 간혹 경험한다. 이와 반대로 작은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목양에는 전혀 무관심한 한량(?) 같은 인사들을 자주 경험한다. 한마디로 성장주의와 부실한 영성의 문제는 대형교회와 교회세습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작은 교회와 일반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해서, 이러한 주장 역시 세습목회자들을 향한 ‘일반화의 오류’일 따름이다.


3. 목회자수습불균형과 신학대학교의 양산

목회자 자질문제의 핵심은 ‘신학교육’과 ‘신학교수급문제’와 연결된다. 양질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교의 정원감축을 통해서 ‘어퓨굿맨(소수정예)’으로 현재의 방만한 구조조정은 필수과제다. 일례로, 감신대는 80년대 이후 정원을 대폭 늘렸고, 일반대학출신의 M.div 과정을 대폭 확대시켰다. 업친대 덥친격으로 80년대 이후 목원대의 정원확대에 이은 협성대의 출현은 외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가속화시키며, 내적으로는 목회자의 자질 하락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신학교가 양질의 목회자양성이라는 본연의 취지를 포기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로 인해, 신학교 교수들은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신학생의 수준은 급격히 저하되었다. 짧은 지면에 신학대학의 총체적인 문제를 다 언급할 수 없기에 비근한 예를 들자면, 금번에 시행된 감신대 총장선거에서 ‘블랙메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비열한 방슥으로 신학대학의 총장이 선출되는 참람한 현실은 타락한 신학대학교의 현주소를 적나라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영성은 커녕 최소한의 상식도 없다. 신학교의 정원의 늘어난 크기 만큼 수급불균형과 목회자의 자질은 함께 곤두박질쳤다. 이것이 목회자수준하락의 진짜 원인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교회세습’이라는 현상에 매몰시키는 것은 실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4. 담임목사직을 매매한 목회자들의 명단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

오세영목사님은 교회세습을 비판하면서 ‘다른 목회자들의 공정한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공정사회의 정의관념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이주연목사님의 <세습은 21세기 신사참배>도 같은 요지를 담고 있다. 교회세습은 인사의 불공정성으로 인해, 대다수의 선량한 목회자들의 기회를 박탈하고 상대적인 절망감을 안겨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불공정한 인사관행은 과연, ‘교회세습만이 문제일까?’, ‘세습만 막으면 공정한 인사가 실현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21세기 한국감리교회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사시스템’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불공정한 인사관행에 대표적인 예는 ‘교회세습’이지만, 이것은 실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담임목사청빙과정을 ‘열’이라고 가정할 때 그중 ‘하나’가 ‘세습’이라면, 나머지 ‘아홉’은 담임목사직을 돈으로 매매하는 ‘성직매매’인 까닭이다. 물론,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듯 예외는 있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예외는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하다. 공정한 기회를 빼앗는 인사비리의 주범은 바로 ‘성직매매’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세습’에만 주목하는 이유는 ‘세습’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와 달리, ‘매매’는 당사자들 간에 은밀한 암거래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돈으로 담임목사직을 사고 판 이들은 ‘유능한 목회자’라는 허울을 쓴채 장래가 촉망되는 건강한 목회자(?) 행세를 하며 호사를 누린다. 더러운 돈으로 거룩한 성직을 매매하는 관행은 ‘침묵의 카르텔’을 통해 암암리에 자신들만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우리는 ‘교회세습’에만 열을 내며 ‘공정한 기회’를 맥없이 유린 당하고도 그 실체에 무지하다.


5. ‘신은급법’은 본질이 아니다.

‘담임자 매매’를 감히 폭로할 수 있는 까닭은, 나 자신이 세 번에 걸친 ‘담임자 매매’ 요청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목회자는 브로커를 통해 후임자에게 권리금, 또는 전별금 형식의 돈을 우회적으로 요구한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서 적게는 1억에서 많게는 3억에 달했다. 좋은 목회자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수익을 챙기는 브로커들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전현직의 유력한 목회자들이다. ‘담임자 매매’의 또 다른 예는 개교회 청빙위원회의 유력한 장로들에게 뒷돈을 직접 건내는 경우도 있다. 최근들어, 대형교회 부교역자들이 진출이 부쩍 눈에 띄는 그 이유는 1, 2억으로 ‘무모한 생개척’을 시도하기 보다, 같은 값이면 안정된 목회자리를 손쉽게 확보하는 매매를 선택하는 까닭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관행에 뒷돈을 대며 앞장서는 목회자가 가운데는 소위 한국감리교회의 표상이라 일컬어지는 명망가들도 있다.

만일, 필자의 문제제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누군가의 주장대로 ‘교회세습이나 담임목사직매매나 똑같다’는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세습에 대한 지협적인 비판과 적개심을 넘어 공정한 청빙을 위한 객관적인 인사시스템을 마련할 것을 주장한다. 주병환목사님의 코멘트처럼 그져 ‘남주기 아깝다’는 은퇴자들의 개인적인 탐욕와 이기심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평생 목회에만 전념하다가 은퇴를 앞두고 막막한 노후의 실존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목회자들의 안정적인 노후보장을 위한 객관적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은밀하게 진행되는 추악한 관행은 계속될 것이다.(하지만, 오늘날 소위 메이져급에 있는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노후문제로 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은퇴하는 교회와 후임자로부터 이중으로 수익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 현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세습반대법개정이나 신은급법의 대책 따위를 논하는 꼴은 참으로 언발에 오줌누는 격이다.)




********(독자들의 오해를 막고, 논지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길지만 계속 이어 갑니다.)********




제3의 길, 공존과 공생은 가능할까?


1. 세습금지법인가? 파송제의 부활인가?

오세영목사님은 세습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입법을 통해 세습금지법안의 제정’과 ‘파송제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내가 찾는 해법은 이 둘 모두가 아닌 제3의 길’이다. 그것은 ’공존과 화해를 모색하는 길’이다. 점조직 처럼 이루어지는 개교회의 인사관행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할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물론, 파송제를 회복함으로 극복할 수 있겠지만, 이미 개교회주의가 정착한 상황에서 그 실현은 실로 묘연하다. 더욱이 파송제의 기계적인 실현은 또 다른 인사비리와 치열한 교권다툼의 발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인사시스템’을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필자의 관심과 주장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금의 ‘개교회주의’에 현실은 마치 시장경제의 원리에 기초를 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경제체제’와 같다.

이와 달리, 감독에 의한 ‘파송제’와 ‘봉급제’를 표방하는 ‘감독제교회(Episcopal Church)’는 평등과 공익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사회주의경제체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난 전감목 제2차 포럼에서 그 대안으로 조지슘페터(J. Schumpeter. 1883~1951)의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체제’를 제안한 바 있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칼막스가 자본주의 모순으로 폭력혁명을 예언했던 영국의 산업혁명의 폐해를 존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이 막아냈다’고 평가했던 인물이며, 오늘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국가들의 경제원리(그의 대표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성숙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납세를 통해 사회적 공정성을 담보하는 창조적 파괴의 원리를 주창했다. 아마도 슘페터는 이러한 가치를 존웨슬리의 경제윤리에서 차용한듯 하다.)에 기틀을 제공한 경제학자다.


2. 목회연수에 따른 봉급제의 실현

앞서 언급한대로, 파송제를 회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봉급제’의 실현은 가능하다. 한마디로 시골의 작은교회 담임자나 도시의 대형교회 목회자 모두 목회연수에 따라 동일한 기본급을 지급하고, 교회현실에 따라 목회비와 판공비에만 차등을 두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봉급제는 앞에서 지적한 ‘경제적 불평등’과 ‘수급불균형’, ‘교회의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목회자들의 자존감과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봉급제를 시행하고 있는 UMC(美감리회)의 선교적인 침체를 실례로 들면서, 선교적인 경쟁력 약화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설령 이러한 제도가 ‘성장과 부흥’에 악영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에서 녹색’으로 변화를 시도해야 할 시점이라고 여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글 <교회의 세속화 문제>에서 ‘성장이냐 녹색이냐’의 주제로 집중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담금의 현실화”가 요구된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대로 현재 납부시기의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담금문제는 본질을 한참 벗어나고 있는 논란이다. 한국감리교회는 모든 교회에 동일한 비율로 부담금을 징수하고 있다.(간혹 지방별로 차등을 두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면,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비율이다. 요즘 유행하는 \\'경제민주화의 원리\\'에 따르면, 부담금은 교회의 크기와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마땅하다. 대형교회는 더 많이, 소형교회는 더 적은 비율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현실은 대부분의 개체교회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불공정함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선할 기회와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다. 더 기가막힌 현실은 마땅히 ‘노블레스오블리제’를 감당해야 할 유력한 교회들은 현재의 부담금 조차도 제대로 납부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다.


3. 노블레스오블리제

필자는 대형교회와 교회세습을 감당한 교회들이 ‘노블레스오브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할 수 있도록 법제화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요즘 존치문제로 논란이 되는 ‘동대문교회’를 포함해서, 오늘날 백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권의 유수한 교회들은 사실상 미국교회의 선교적 지원으로 오늘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일예로, 감리교본부의 자산(광화문감리회관 등)도 미국선교부의 지원이 그 실제적인 기반이며, 미선교부의 지원조건은 ‘목회자(신학생)양성, 교회개척 및 건축지원, 여성과 아동을 위한 복지사업 등’이였다. 하지만, 감리회관의 수익금은 단 한푼도 본래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고 있다. 이제 자발적인 참여로 ‘개교회주의’로 양극화된 현실을 극복하는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게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발적인 노력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지도적인 교회들은 결코 자신들이 확보한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교리와 장정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안전장치가 되버렸다.

이번 ‘충북연회 부담금 납입지연사태’를 통해 드러난 ‘본부부담금의 연회지원관행’은 그 대표적인 실예다. 잘 알려진 대로, 본부부담금(1%)은 회관건립을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계속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다시 연회에 지원한다.(본부의 운영은 감리회관의 건물수입으로 유지된다) 한마디로 개체교회는 이러한 본부와 연회의 커넥션에 무기력하게 ‘이중과세’를 강요 당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소위 연회감독들이 행정과 입법을 전횡하는 구조가 가능한 까닭이다. 지난 2월 전감목의 원탁회의를 제안했을 무렵, 남재영목사님의 주장처럼 이와 같이 불합리하고 불편부당한 현실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켜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진할 것을 주장하며 노력해왔다. 그것이 바로 전감목이 제안한 ‘3대 제도개혁안(감독제도, 선거제도, 총대제도)’이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거권’과 ‘입법권’의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필자가 지난 4년간 전감목을 통해서 \\'선거권확대\\'와 \\'입법총대의 직접선출\\'을 그토록 주창했던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모델

선교환경의 변화로 오늘날 절대 다수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생존의 위협을 경험하며 절망하고 있다. 이러한, 불공정과 양극화의 문제는 결국 “미자립교회의 문제”로 연결된다. 현재, 미자립교회 정책은 ‘인디언보호 정책’과 같은 생색내기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감리교회가 진정한 공교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선교적인 미래를 열어가려면 반드시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모델’을 실현해야 한다. 최근 순복음교회의 급성장과 구원파, 신천지 같은 이단교회들의 전략은 바로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까닭’이다. 허태수목사님의 지적대로 오늘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업형 대형마트와 골목의 소형상인 간의 경쟁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 처럼 상가임대교회들의 실존은 참으로 절망적이다. 또한, 시골오지에 있는 영구미자립교회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해서, 봉급제와 더불어 최소한의 선교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개척하고 지원해야 한다. 한마디로 중소도시와 거점도시, 신흥도시에 감리교회를 짓고 목회자를 파송하는 일이다.  


5. 교회, 해비타트운동

이것은 마치 무주택자들을 위해서 힘을 모아 집을 지어주고, 그들이 자립해서 또 다른 무주택자들에게 삶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이 자발적으로 연속되는 “해비타트 [Habitat]운동”의 방식과 같다. 상상해보라. 이와 같은 과정으로 자립하고 건강하게 성장한 교회들은 머지않아 또 다른 교회들의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될 것이다. 5년 후, 10년 후 감리교회의 선교적 지평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한국감리교회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한치 앞의 혼란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현실이다. ‘선교에 쓰여져야 할 거룩한 물질과 막대한 에너지를 선거에 허비하고 있다.\\' 실제로 2년에 한번씩 진행하는 선거비용(내일 모래면 은퇴해야 할 유권자들에 주머니로 흘러들어 가는 헌금)을 모으면, 한해에 거점도시에 마다 10개의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규모에 해당된다. 최근 재선거무효로 인한 반환소송으로 주목받고 있는 선거입후보비용만으로도 중소도시에 교회를 건축하고도 남는 규모다. 한마디로, 작금의 감리교회는 \\'오늘의 부패가 내일의 희망을 무참하게 갈취하는 양상이다.\\' 도대체 언제까지....‘누가 감독회장되는가?’의 감투싸움과 불편부당한 ‘교리와 장정의 수호’을 외치며, ‘교회세습반대’ 따위에 지협적인 논쟁에 매몰되어야 한단 말인가?, 실로, 지난 10년간의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며 절박한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실로 철지난 연가요, 한낱 공허한 논쟁일 따름이다.


강릉예향교회 김명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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