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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
관리자
- 1916
- 2012-07-24 09:00:00
열왕기하 6:14-19, 요한복음 20:19-23.
우리는 한 평생 많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듯이, 천 길 낭떠러지를 지나가듯이, 곡예사가 외줄을 타는 듯이, 손에 땀을 쥐는 불안과 초조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한 일들이 많을까요?
우리들은 이런 불안과 두려움들을 이겨나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업의 문제, 직업의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우리들의 숨통을 조여 옵니다. 그래서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마음이 편할 때가 없이, 이 고난 많고, 어려움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에게서도 나의 어려운 사정과 형편에 대해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이 좁은 방안에 함께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 속에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과 갔습니다.
만약 그 때, 누가 잠긴 문을 노크라도 했더라면, 예수님을 처형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유로 이제는 제자들을 잡으러 온 줄로 알고, 아마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이 숨어있는 좁은 방의 분위기는 마치 적진 속에 숨어들은 첩자들이 수색하는 무리들의 눈을 피해 숨죽이고 숨어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무서운 중죄를 지은 죄인이, 죽음을 피해 숨을 죽이고 숨은 듯한, 무거운 침묵의 순간입니다. 어떤 인기척만 들려도 간담이 녹아내릴 초긴장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잠겨 진 문을 열지도 않고, 노크도 하시지 않고, 방안에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안할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불안해 떨고 있는 분위기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을 열지도 않고, 노크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오셔서 먼저 평안을 빌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육신 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도 영적인 갈급함을 위로 받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눈물로 부르짖고 기도하여도 시원치 않고, 숨이 막힐 듯이 마음이 답답할 뿐입니다.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방황할 뿐입니다.
시원하게 심령을 위로해 줄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마음이 편해야 세상이 편하고 만사가 편할 것 같습니다.
이런 불안과 초조함 속에 마음의 문마저 굳게 닫혀버렸고 숨이 막힐 정도로 잠겨있을 때, 부활의 예수님은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너에게 평안할 찌어다”라고 위로하시고 축복하시면 얼마나 기쁠 것입니까?
사회와 가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마음의 문이 닫혔고, 정의 문이 닫혀졌으니, 은혜와 사랑의 주님이 오셔서 위로해 주시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두려움과 염려로 닫혀 진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평안을 얻어야합니까?
1. 지도자를 잃은 염려와 걱정에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거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던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각자의 직업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이 각자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찾아 오셔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즉시 따라 나서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성실히 배우며 섬겼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했으나, 예수님처럼 신뢰하고 따를만한 스승을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다운 지도자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 중심까지 모두 보시고, 그들의 사정과 형편까지 모두 아시며, 과거와 현재까지를 모두 꿰뚫어 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시는 영력에 이끌려 즉시 따랐습니다.
자신들의 직업과 일터와 가정과 부모와 처자와 형제들까지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배와 그물과 지금까지 수고하며 애써서 잡은 물고기들까지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젊음과 꿈과 생명을 주님께 맡기며 따랐습니다.
가난한 어촌에서 살며, 그들이 배와 거물들을 장만한다는 것은 거금이 드는 매우 힘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부르실 때, 단호히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권능의 말씀으로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셨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만나본 어떤 스승들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세상의 어떤 랍비들보다 권위 있고 진실하며, 참된 랍비이셨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쳤고,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을 했고, “주여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까?”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우리의 가족과 전토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가 넘쳤고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평안으로 가득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셨고, 문둥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더러운 병을 쫓아내셨습니다. 12년 동안 고통하며 신음하던 여인의 혈루 병을 고치셨으며, 38년 동안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던 병자를 치유하셨으며, 중풍병자와 한편 손 마른 자를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바구니에 남게 거두셨으며,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에 남게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권위 있고 능력 있는 말씀을 증거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위로 받지 못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방황하는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온 힘과 정력을 다해, 세상직업에 나서보기도 했고, 열심히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보았으나, 영적으로 평안이 없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없었습니다.
세상생활은 그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고 따르며, 순종할 때, 말씀의 능력 안에서 평안을 얻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푯대로 삼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라”고 권하십니다. 스승이 되시고 지도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모두에게 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주에 있는 수십억 개의 많은 별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성들은 제각기 항로를 지킴으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핸들을 잡은 기사가 없으면, 어떻게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배에 키를 잡은 선장이 없다면, 어떻게 항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도하는 스승이 없다면, 학생들이 어떻게 학업에 전념을 할 수 있습니까?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환자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병을 치유 받겠습니까?
참된 지도자를 만남은, 인생의 바른 진로를 설정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상천하지에 가장 훌륭하고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스승이 되셨고, 지도자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미래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가 좋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무슨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버지께 물어서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면 비록 잘못되는 경우가 있어도,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이되고부터 의논하거나 결재를 맡아야할 대상이 없으니 혼자 결정을 하고 혼자 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저는 아버님의 슬하에서 지도를 받으며, 생활하던 때가 좋았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이렇게 모든 행동과 결과에서 책임이 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영원한 지도자이시며,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허탈과 허무함은 무섭게 그들을 두렵고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걸어 잠근 문을 열지 않고 노크도하지 않고 들어오셔서 방 한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늘의 평안이요, 영원한 평안입니다.
2. 목표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평안을 주었습니다.
어부들이었던 그들은 삶을 이끌어주고 인도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에 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바른 삶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앞으로 전진 하게하는 삶의 노정기입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유리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목적지를 잃는다면 어디로 비행하겠습니까?
넓은 대양을 항해하는 배가 목적지를 잃으면 어디로 항해하겠습니까?
달리는 차에게 목적지가 없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생활기반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가정의 생활문제도, 가족들의 생사도, 자녀들의 장래와 삶도, 모두 주님께 맡기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꿈과 희망을 걸고 믿음으로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어이없이 죽으셨으니,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그들은, 희망도 꿈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주님을 의지하며 따를 때,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소유한 것도 없고, 자랑하며 내세울 것도 없었지만, 주님을 섬기며 따르는 삶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출세한 것이 없고, 명예를 얻은 것도 없지만, 지혜와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삶 은 기뻤습니다. 그래서 가족도, 직업도, 생활도, 포기하고 예수님께 목표를 두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차라리 고삐 풀린 말은 다시 야생상태로나 돌아가지만, 삶의 목표를 상실한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에서 의욕마저 상실하였으니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제자들은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세의 길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제자들 중에는, 한 때, 예수님께서 권세를 잡으면 좌정승 우정승을 꿈꾸고 기대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열쇠를 약속받은 제자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에 하늘로부터 우레 같은 불을 내려 진멸시키자고 요구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 때, 주님과 더불어 죽으러가자고 말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린다할지라도, 나는 죽는데 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한 제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나니, 그들의 꿈도, 그들의 계획도, 모두 끝나고 삶의 목표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들은 한 때, 예수님으로부터 큰 권능을 받아 귀신들을 쫓아내었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으며, 힘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신나게 선교 여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신나게 전도하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며,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했던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옛날 엘리사 시대에는, 아람군사들이 사마리아 도단 성을 메뚜기 떼와 같이 에워싸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성안의 사람들은 한 때, 아람군사들이 에워쌈으로 양식이 부족해 굶주림으로 비둘기 똥과 벌레들까지 잡아먹었고, 자식까지 삶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시중드는 사람은, 아람군사들이 성을 에워싼 것을 보고, 놀란 가슴으로 엘리사 선지자에게 달려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염려도 근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람군사들보다 더 많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군과 천사들이 불 말과 불 병거들을 동원하여 사마리아 도단 성을 지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는 기도로 시종 드는 자의 영안이 열려지게 하자, 그는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들이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안심을 하였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만들고, 낙성예식에 참집한 사람들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불가마 속에 던져 넣는다는 엄한명령을 알고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7배나 뜨겁게 한 불 가마에 던져 넣었습니다(단 3장).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30일간 왕 외에 다른 신에게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를 내려 금령을 세운 줄을 알았으나, 다니엘은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자기 집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숨어서 다니엘의 기도하는 것을 왕에게 고하여,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단 6장).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목표와 생활목적이 뚜렷하였기에, 생명을 걸고 불의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들을 불가마 속에서도 구원하셨으며, 사자 굴에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목표와 목적을 잃으면 아무런 의욕도 꿈도 상실하고 맙니다.
삶의 목표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고 맙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삶의 목표를 상실했다고, 낙심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의 꿈과 희망을 모두 잃었다고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셨습니다.
3. 고난과 죽음의 불안에서 평안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가야바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한 것을 압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손에는 갈대를 쥐고, 이 뺨 저 뺨을 맞으셨으며, 온 몸에는 가죽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사흘을 이리 절리 끌려 다니시며,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쉬지도 못하시고 물 한 모금 떡 한 조각도 잡수시지 못하셨습니다.
끝내는 불법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골고다로 향할 때, 감당할 수 없어서 14번이나 쓰러지고 넘어지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진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온 몸에 가죽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려칩니다. 온 몸을 감으며, 깊은 상처를 남긴 채찍 자국은, 살을 찢고 뼈를 부시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든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고, 여인들만 따르며 안타깝게 웁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에게 “여자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굵은 쇠못은 예수님의 두 손과 두 발의 살을 찢고, 뼈를 부시며, 신경과 혈관을 뚫었습니다. 구렁이처럼 굵은 혈관들이 꿈틀거리는 근육질의 로마 군병들은, 그 억센 팔을 걷어 부치고, 불끈 쥔 쇠망치를 힘껏 내리쳐, 예수님의 두 손과 두 발에 쇠못을 박았습니다. 둔탁한 쇠망치 소리는 죄인들의 양심을 깨우치기나 하려는 듯, 심령의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집니다.
죄 없는 죄인을 죽여서라도 얻게 되는 사형수의 벗긴 옷의 소득을 생각하는지, 만면에 희열의 미소를 머금고, 잔혹한 로마 군인들은 신나게 쇠망치를 내려쳐서 십자가에 못을 깊숙이 박았습니다.
조롱하며 비웃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은 두 손과 두 발에 쇠못에 박혀 진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습니다.
둘러싼 무리들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고통하며 신음하시는 예수님을, 세상에 다시없는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바라보며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을 고통으로 절규하시며,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어떤 로마 군인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깊이 찔렀습니다.
그러자 운명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로 판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큰 돌문을 굴려다 무덤을 막았습니다.
제사장은 돌문에 밀 인봉을 찍고, 로마군병 네 사람씩을 교대로 세우며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장사되신 모습을 몰래 숨어서 보았거나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갈릴리 사람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죄로, 불똥이 자신들에게 언제 떨어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모닥불을 쬐며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베드로에게, 작은 계집종이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행동했던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하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혼비백산하고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집종이 재차 물었고, 또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이 당하는 심문과 조롱을 자기도 받지 않을 까봐 두려워서 “나는 아니라”고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나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겁이 나고 두려웠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알아보고 붙잡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근 문을 열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방안으로 들어오시더니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는 평안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찾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얻는 평안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심령 속에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오늘 지구가 멸망을 당하고, 세상이 온통 소돔 성처럼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한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는 평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의심과 두려움과 걱정을 이기게 하는 평안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자신의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각과 지혜가 모자라서 불안하고 초조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 부패해 두렵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범죄 함이 많아 두렵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두 손에 쇠못이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패하고 악하여 두렵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두 발에 쇠못이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부패하여 두렵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온 몸에 가죽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받으신 상처들의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참 평안을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