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김명섭
  • 1804
  • 2012-07-25 09:00:00
1.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는 확신은 과연 진실일까? 대한민국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모토로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해리라\\'는 신념을 마치 종교적인 신앙처럼 여겨 왔다. 추구하는데로 얻게 되는 영적인 원리대로 한국사회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가 놀라는 성장과 발전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장과 발전이 과연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한국사회는 경제발전이라는 찬란한 영광의 뒷편으로 양극화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로 인한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의 한국사회는 한해 수십만명의 자영업자들의 파산하고 중산층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살인적인 청년실업과 대량해고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로 세계에서 자살율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전쟁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가 소위 1%의 특권층에게는 행복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99%의 행복을 유린하고 있다는 비판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하리라\\'는 흐름에 편승했던 한국교회 역시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충실한 반려자가 되어 세계 교회사에 유래 없는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오늘날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이룩한 한국교회를 향해 세상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타락한 교회’라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수많은 선배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헌신과 수고로 이루어 낸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한국교회의 영광과 존경이 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은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진리를 외면한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탐욕과 어리석음의 결과다.
사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진다\\'는 신념은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만이 추구했던 가치가 아니라, 유사이래 모든 권력과 모든 인간들이 추구했던 거스릴 수 없는 거대한 탐욕의 물줄기였다. 하지만,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 되면서 본격화 된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경제위기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상승, 취업난과 생활고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전세계가 경제적인 고통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받아 들여왔던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는 삶의 가치와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가 꽃피운 이후로 이와 같은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20세기 이후 폭력적인 방식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시도했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90년대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이미 종말을 선언했다. 이에 대항해서 시장경제의 모순을 국가적인 개입과 복지로 극복하려던 수정자본주의(케인즈주의)도 무력화 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질서를 경제논리로 재편해 버린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는 결국 ‘1%대 99%’라는 사회적인 불평등과 ‘헤지펀드(Hedge Fund)’라 불리는 거대한 투기자본, 다국적기업과 재벌 중심의 기형적인 경제현실을 양산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제3의 대안으로 여겨지던 북유럽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社會民主主義, social democracy) 역시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원인과 전망에 대해서 경제학자들은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한 방식은 2, 30년전의 경제발전과 경제부흥과 같은 옛 시대의 영광이 회복되길 꿈꾸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철지난 연가(戀歌)요, 한낱 신기루(蜃氣樓) 였음이 입증되었다. 대한민국이 5년전 소위 경제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마치 경제적인 메시야처럼 열광했지만 7,80년대식 대규모 토목공사 따위로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할 순 없었다. 그런 가운데 경기침체는 더욱 극심해지고 부동산의 거품은 빠지고 중산층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한마디로 개인적으로 보면 더 이상 예전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없는 현실이요, 국가와 사회적으로는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경제적인 부흥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제현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세 가지의 중요한 진실을 증거한다. 그 첫째는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그릇된 맹신의 허구성이요, 둘째는 더 이상 예전 처럼 많은 돈을 벌 수가 없다는 한계성이다. 그동안 서민들의 유일한 재산증식의 수단이였던 부동산 거품은 빠졌고 급속한 경제성장이 안겨 주던 폭발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은 끝나버렸다. 민주주의에 확대와 정보의 공유, 지식인의 증가로 더 이상 특정인들이 부당한 폭리를 취하는게 어려워졌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댓가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 성숙했다. 따라서, 수입은 점차로 평준화 되고 예전과 같은 폭리와 대박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대기업과 부유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발버둥치고, 대다수의 서민들은 더 깊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사회적인 갈등과 분쟁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마지막으로 작금의 경제상황을 통해 깨닫게 되는 세 번째 진실은 지금까지의 인류가 추구했던 물질과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doubt, 懷疑)\\'와 성찰이다. 다시말해, \\'자본주의\\'가 표방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통한 무한경쟁이나 \\'사회주의\\'가 표방했던 국가의 폭력적인 개입, 그리고 사회복지시스템의 확장을 통해 이 둘을 적절히 혼용했던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핵심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제체제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의 공통점은 모두 물질과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다만, 한쪽은 물질의 \\'축적\\'을, 또 다른 한쪽은 물질의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물질적인 가치 곧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방식에 의해서 행복을 찾고자 했다는 측면에서는 한치도 다름없는 마치 한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비극적인 샴쌍둥이와 같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진실이 증거하는 결론적인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물질의 축적이나 분배, 경제적인 시스템과 같은 물질적인 방식만으로는 참된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반성이요,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적인 성숙(영성)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자각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노력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해답과 실현은 언제나 가능할찌 실로 요원한 현실이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상황과 타인만을 탓하며 갈등과 투쟁에 빠져 행복을 유보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절망하며 인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경제적인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지혜는 적은 소유로 최소한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내면의 성숙을 통해 소유에서 향유로, 탐욕에서 영원한 가치로, 풍요로운 삶에서 풍성한 삶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페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능하다. 놀랍게도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을 위한 제3길은 이미 이천년전 기록된 누가복음의 예수를 통해서 증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를 높이는 삶의 방식이요, 탐욕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절대 다수의 필요를 소수가 강탈하는 불공정한 구조를 개선하는 노력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할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동시에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3. 녹색인가, 성장인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강릉은 일명, \\'저탄소녹색성장도시\\'다. 녹색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참신한 발상인데, 그 취지는 가상하지만 실제로 이루어 질 수 없는 허구요, 간교한 속임수다. 이처럼 단정적으로 폄하할 수 있는 근거는 본디 \\'녹색\\'과 \\'성장\\'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인 까닭이다. 녹색과 성장은 마치 탐욕과 성령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고 반비례하는 상반된 가치다. 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녹색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녹색을 포기하고 성장을 추구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성질의 문제다. 녹색과 성장이 상반된 개념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실예가 \\'원자력발전소\\'다. 원자력발전소를 선택하는 까닭은 경제적인 효율성에 있는 반면 필연적으로 핵폐기물과 위험을 품고 있다. 세계 원자력발전강국으로 손꼽히던 일본은 얼마전 대지진으로 인한 원자력참사를 경험한 후 2050년까지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전면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소개한 국부론의 저자인 에덤스미스의 주장대로 제한적인 물질을 가진 세상에서 특정인의 풍요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필요를 강제해야만 가능한 것처럼,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연파괴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더 중요한 점은 개발을 통한 성장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젠 아쉽지만 성장에 대한 기대를 단호하게 포기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녹색을 추구하는 결단과 지혜가 요구된다.

성장에서 녹색으로 돌이키는 지혜는 한국교회에도 요구되는 대목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여전히 7,80년대와 같은 부흥과 성장을 소망하지만 수평이동으로 부흥하는 소수의 교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들 특별히 중소형교회들은 끊임없는 침체와 극격한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돌이켜 회개해야 할 기회다. 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돌이켜 회개해야 할 시점이다. \\'Again 1907\\'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신은 회개를 통한 이전의 부흥과 성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추구하던 \\'부흥과 성장\\'에서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녹색교회\\'로의 회개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제 성장하고 부흥하는 대형교회가 아니라 작아도 복음에 충실한 성숙한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7년간의 대풍년으로 7년간의 대흉년을 대비했던 요셉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교회성장을 기반으로 해서 미래의 성숙한 교회를 위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다. 한국교회는 성장에서 성숙으로 외적인 내적인 개혁을 실천해야 한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성장과 부흥의 모델에서 이제 내면의 강함과 성숙을 배우고 가르치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성장에서 녹색을 추구하는 지혜는 개개인에게 더욱 요구된다. 축척에서 나눔으로, 소유에서 향유로, 이기적인 탐욕에서 이타적인 사랑으로 가치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적어진 수입으로 자족하고 규모있는 소비생활을 통해 행복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마지막 날의 심판이 있다. 누구나 한번 맞게 되는 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우리의 삶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가를 판단하지 않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가에 의해서 평가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의미는 인생에서 만나는 위기의 순간을 말한다.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물질과 인기, 건강과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그날’이다. 소유만을 추구하던 신앙은 삶의 위기로 인해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는 순간에 절망과 고통, 원망과 불평으로 침몰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던 신앙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 평강과 희망을 빼앗기지 않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한국사회의 위기, 한국교회의 위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해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준엄한 경고다. 무서운 재앙과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적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완고함으로 회개치 않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한국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소유에서 섬김과 나눔과 같은 영원한 가치로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자족하는 삶을 위한 영성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신앙을 성장에서 성숙으로, 축적에서 나눔으로, 부요에서 자족으로 돌이켜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행위의 차원이 였다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으로 목적과 동기를 돌이켜 회개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본문의 무리들처럼 인기와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것이였다면 이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로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신앙고백을 빼고는 모두 다 바꾸어야 할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썩어질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근본적으로 회심해야 한다. 새 세상과 참된 행복은 이처럼 회심한 사람들을 통해서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불려지던 중세의 로마카톨릭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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