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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하나님의 의"
관리자
- 1646
- 2012-07-27 09:00:00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나라 서해안 쪽에는 썰물이 되면 갯벌들이 넓게 들어 납니다.
해안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개펄에서 많은 소득을 얻습니다.
바지락, 꼬막, 계, 낙지, 굴, 소라, 등 그 갯벌에서 캐어 많은 소득을 얻고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아낙네들은 나중에 갯벌에 들어가서 온몸에 갯벌로 더러워진 몸을 비누로 씻어 냅니다.
그러나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악들이나 마음에 쌓인 죄악들은 비누로는 씻어지지를 아니합니다. 이세상의 어느 세제로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몸에 묻은 더러운 것들은 비누로 씻어낼 수는 있으나, 사람이 지은 원죄와 자 범죄의 더러운 죄악의 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 공로가 아니고는 씻어 내지를 못합니다.
로마서 3:21-22절은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런데 그 속죄의 방법은 더욱 은혜로 넘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에 묻은 더러운 것들을 씻기 위하여 비누를 사용해야 하는데, 비누를 구입하려고 해도 돈을 줘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력이 없어도 씻을 수 있다는 것이니 놀라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사야의 증거처럼, “값없이 돈 없이 받은 은혜”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된다고 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믿음은 돈으로 치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루고 얻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모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폭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요구는, 물질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 가지의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앎” “진리에 대한 동조”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의 요소 중에 어느 한 가지도 떠나서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란 단순히 진리에 대한 지적인 앎으로 전부인 것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가득 채웠다고 해도 그것으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인정으로라도 믿음이라고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박사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인정은 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으나, 귀신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완전히 나를 예수님께 의지하고 맡기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로 엮는다면 이렇습니다.
어느 목마른 사람이 죽어가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물을 먹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에게 그런 지식이 있음으로 그에게 그릇에 물을 담아놓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물을 가까이 하게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음으로 인하여 물을 그릇에 담기까지에도 그에게 소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구하는 단계가 중요한 과정이지만 그것이 그의 생명을 구하는 최종목표가 되지 못합니다.
그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물을 마시므로 그가 살아나게 됩니다.
물을 마시면 그 물이 내 속에 들어와서 갈한 나에게 활기를 얻게 하고 나는 물을 마시므로 물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가 믿음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믿음을 소유하는 삼단계의 과정에서 어느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아니 되고 삶을 얻는 과정의 중요성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보는 눈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나는 죄 속에서 살았고, 나는 하나님을 거역했고, 나는 행악자요 광포 자였다. 나는 비열하고 추하며 내가 범하지 않는 죄를 한 가지도 없이 다 저지르며 살았다. 나는 아직도 내 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게 주신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고 나의 능력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왔다. 이제부터 주님의 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그러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귀한 믿음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거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 당하시는 희생이 온 인류에게 영원한 영향을 주시고도 남음이 있으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을 열어 비를 내리시면, 세계의 어느 나라, 어느 고을, 어느 백성에게든지 골고루 내리시며, 해를 비추면 온 세계가 햇빛으로 밝은 광명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삼으시는데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이 부족하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기를 주셔서 온 인류가 호흡하고 살거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온 인류에게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루 속에서 콩나물이 빨리 크는 순서대로 선택되어 뽑혀나듯이 믿음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먼저 의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은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급 백성들은 홍해 바다 속에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며 찬송을 부르고 이스라엘을 인도한 천사들도 함께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후 천사가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꾸짖으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찬송을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너까지 왜? 기뻐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급 백성들도 다 내가 만든 인간들이다.”고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애급 백성들이나, 모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을 다 같이 구원하시려고 뜻을 두셨습니다.
다만 그중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구별하고 인종 간에 지식 간에 계급 간에 차별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차별하시고 믿음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많은 자녀들 가운데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부모에게 더 큰 사랑을 받듯이, 많은 제자들 가운데 좋은 성적을 올리는 제자가 스승의 사랑을 받듯이, 많은 민족 많은 백성들 가운데 믿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성경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허락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우리는 좀 더 이 말의 깊은 의미를 상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말의 정의를, 우리가 가진 믿음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받기 쉽습니다.
글자 그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진 믿음의 공로로 구원받게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만 구원의 그릇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그릇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우리의 믿음의 그릇에 구원을 이루도록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아침마다 그릇을 가지고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양식을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아침 이슬과 같이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릇을 가지고 나아가 만나를 거두어 그릇에 담아 그 날의 양식을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을 가지고 나아가 만나를 거두듯이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만나를 담지 못했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고루 내려주시는 만나였으나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면 만나를 담지 못하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채우는 준비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아놓고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믿고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았으나, 믿음이 없는 자들은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의 그릇에 구원의 은혜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믿음을 가진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은 믿음의 그릇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공기가 닿는 곳, 빛이 닫는 곳, 습기가 미치는 곳, 어둠이 있는 곳, 어디에나 하나님의 의가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을 준비한 성도들이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듯이,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까지도 하나님은 의로 가득하게 예비하여 주셨습니다.
마치 포도원에서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들보다도 더 많고 큰 은혜로 의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주저하지 말고 누구나 손을 내밀어서 거두어들이는 자들에게는 그 축복은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충만하게 익었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고 준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게으른 5처녀들과 같이 슬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자 우리 모두 우리 주위의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의 의에 차별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봅시다.
햇빛, 공기, 비, 눈, 어느 것 무엇이나 차별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거룩하나 망령된 자들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은혜를 내리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야만인이건 문화인이건 서구인이건 동양인이건 지혜로운 자이건 미련한 자이건 옛 언약에 살건 새 언약에 사는 사람이건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개인의 교육이나 성격이나 재능이나 소유물에도 차별을 두지 아니합니다.
개인의 인격이나 품위나 건강 상태에도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인물이나 골격이나 가문이나 벼슬이나 학문이나 명예에도 관심을 두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