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2:3-7(설교: 본이 되어야 할 교역자:지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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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10:06:12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의 좋은(칼로스, καλὸς)은 디모데전서 3:1의 “선한”의 주석을 보라.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는 1:8의 주석을 보라.
이어서 바울은 군인의 특징에 대해, 【4】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군사로 다니는(스트라튜오메노스, στρατευόμενος), 즉 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프라그마테이아이스, πραγματείαις) 곧 일상 업무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일에 전념해야만 하는 것이다…이 말은 기독교인이 이 세상의 사명이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생존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생계를 세워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일에 종사하고 있더라도 그는 기독교를 실증하는 생활 방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W. Barclay).
특히, 성직자의 경우에는 시대와 환경을 무시한 채로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성직자는 물질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직자가 물질적인 궁핍 때문에 영적 사업(목회)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뒷받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에게만 기업을 주지 않으시고,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가지고 생활하고, 또 성전 운영에 쓰도록 하셨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군인은 또한 자기 자신에게 얽매여서도 안 된다. 그는 항상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유 여하를 묻는 것’은 군사로서의 의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진리라 하겠다. 특히, 전투 중에 있는 병사로서는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결단은 전투 지역의 전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지휘관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최우선적인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일상 업무에 얽매이지 않고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를 가리켜,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토 스트라톨로게산티, τῷ στρατολογήσαντι) 곧 그를 입대시킨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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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말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충성이다. 어떤 사람이 1914-1918년의 전쟁 당시에 포슈 장군(Foch<1851-1929>: 프랑스의 원수이며 1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 총사령관)과 어떤 장교와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다. “귀관은 후퇴해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해!”라고 포슈 장군이 명령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라고 장교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랬더니 장군은 “그럼, 그렇고말고.”라고 대답하였다.(in W. Barclay).
그리스도의 군사 우리 역시 영생을 주신 그리스도께 목숨을 다해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행 7:59, 20:24, 계 2:10).
목회자 또는 기독교인을 군사로 비유한 바울은, 이제는 운동선수로 비유하여 【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바울 서신들의 특징의 하나는 운동선수들의 모습을 즐겨 묘사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헬라에는 어느 도시에나 단순히 마당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운동장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종종 영원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 토론한 곳은 바로 이 운동장 안에서였다. 철학자들과 궤변론자들, 순회 교사들과 설교가들이 청중을 찾는 것도 대체로 이 운동장에서였다. 헬라 어느 도시에나 있는 운동장은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는 장소일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지적 집회소이기도 하였다.
헬라 시대에 고린도에서는 이즈미안(Isthmian) 대 경기가,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판이오니안(Pan-Ionian) 대 경기가 행해졌는데, 그 중 최대의 것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Olympic) 경기였다. 헬라의 대부분의 도시는 때때로 반목하고, 어떤 때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 때가 돌아오면, 아무리 싸움이 심한 경우에도 1개월의 휴전이 선포되고, 서로의 우정 속에서 경기가 행해졌다. 경기장에는 운동선수들뿐만 아니라, 역사가들과 시인들이 최근의 새 작품을 낭독하기 위해서, 또 불후의 명성을 가진 조각가들이 경기의 승리자들의 상을 조각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바울이 고린도나 에베소에서 행해진 경기에 관객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군중이 모이는 곳이라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러 갔다. 그러나 바울이 설교를 했는지는 별 문제로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이 같은 경기에서 무엇인가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바울은 권투 경기를 알고 있었고(고전 9:26), 모든 경기 중에 가장 유명한 육상 경기를 알고 있었으며, 경주자들을 출발 전에 불러내는 전달자를 본 일도 있었다(고전 9:27).
그리고 그는 온 힘을 다해 결승점을 향하여 노선을 달려가는 경주자들과 경기의 마지막에 심판관이 상을 주는 것도 본 일이 있었으며(딤후 4:8), 또한 그는 승리자가 받은 월계관과 칭찬도 알고 있었다(고전 9:2, 빌 4:1). 무엇보다도 그는 경기자가 받지 않으면 안 될 엄격한 훈련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규칙을 알고 있었다(딤전 4:7-8, 딤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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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울은 목회를 경기장에서의 경기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기의 공통점은 경기자가 전력을 다 쏟아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법(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경기자가 아무리 애써서 우승을 했다 하더라도, 규칙을 위반했다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록(W. Lock)은 “목회자의 경기의 법이란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경기자의 최고의 목표이자 최고의 영예가 승리의 면류관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최고의 목표이자 최고의 영예는 그 날에 생명의 면류관(약 1:12), 또는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얻는 것이다.
교역자를 군사와 경기자로 비유한 바울은, 이번에는 교역자를 농부로 비유하여 【6】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다.
수고하는 농부의 수고하는(코피온타, κοπιώντα)은 디모데전서 4:10의 주석을 보라.
이 구절의 취지는 전력을 다해 목회하는 교역자가 교회에서 존경과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딤전 5:17, 18의 주석을 보라).
끝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7】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라고 하였다.
생각하라는 노에이(νόει)로서 ‘숙고하다’, ‘이해하다’를 뜻하며(엡 3:4, 막 13:14, 요 12:40), 총명은 쉬네신(σύνεσιν)으로서 {특별한 경우에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능력(T. K. Abbott) 또는 이해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보트(T. K. Abbott)와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헬라인들은 이 말을 때때로 비판적 지식의 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기초 원리에 관한 지식을 적용하는 능력을 의미하게 되었다”(W. Barclay)}(골 1:9의 주석).
이 구절의 요지는, 디모데가 바울의 말을 숙고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범사에 분별력 또는 이해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재케 하시며, 주신 것들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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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246-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