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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속도야!
관리자
- 2110
- 2012-08-09 03:16:04
― 「마태복음」 6장 31절-34절
오늘날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부채 자본주의’는 부채를 통한 거품의 형성과 터트리기를 반복하면서 성장해가는, 대단히 투기적인 성격의 자본주의다. 부채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크게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첫째 단계는 2차 대전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로, 이때까지 잘 나가던 자본주의는 1,2차 오일쇼크로 급작스럽게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는 거품을 계속 유지할 해법을 쉽게 찾았다. 부족한 돈을 더 찍어낸 것이다.
그러자 급여도 올라가고, 복지 혜택도 늘어나며, 결국 경제도 계속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돈을 마구 찍어낸 결과 1980년대 들어서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다시 새로운 처방으로 공공부채를 통해 정부지출을 확대시켰다.
하지만, 정부 부채 확대가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고, 부채자본주의는 이제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마지막 단계는 공공부채가 민간부채로 이전되는 것인데, 주로 부동산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상환능력을 거의 따지지 않고 빌려주었던 부동산 담보대출, 그리고 은행이나 저축은행 등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하면서 외국(주로 일본)에서 차입했던 대금들을 이제 갚아야 하는 시점이 돌아왔건만, 부동산 경기가 장기 침체에 들어서면서 결국 민간부채에 의해 만들어진 거품도 곧 터질 상황인 것이다. \\'하우스 푸어\\'들이 길거리로 나앉고 은행들이 줄줄이 망하는 시점이 코앞에 닥쳤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부채 자본주의가 계속 거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가 계속 확대재생산 된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자본이 더 빠르게, 또 더 멀리 움직일 수 있어야 했으며, 이러한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삶 역시 더 바빠져야 했다.
심지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수준까지 분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부채 자본주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하기도 하고, 이 사회의 문화적 코드는 ‘빠름’ 혹은 ‘속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채 자본주의의 빠르고 피로한 사회의 속도는 화석연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석유는 자본의 빠른 회전과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삶의 속도를 피곤할 지경으로 높여 주었다. 하지만, 석유는 이제 더 이상 무한정 제공되지 않는다. 이른바 석유생산이 정점에 달하는 시점, 즉 피크오일(peak oil)이, 빠르면 2015년, 아주 보수적으로 잡아도 2025년 정도면 닥치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비 없이 피크오일이 도래해서 석유가 더 이상 우리의 충실한 에너지 노예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갑자기 맹렬한 삶의 속도에서 내동댕이쳐진다. 값싸고 편하게 공급되던 식량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휘발유 값이 리터당 몇 만원이 되며, 약품을 만들 수 없어서 간단한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겨울에 난방 할 대책이 없어서 동사하거나 여름의 무더위로 사망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끔찍한 상황이 닥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의 가정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지만, 만일 부채 자본주의가 첫 번째 위기국면을 맞이했을 때, 화폐를 찍어내서 오일 쇼크의 충격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석유 자원의 공급량에 맞춰서 우리 삶의 속도를 천천히 조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 다른 삶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빠르고 피로한 삶이 아닌, 느리고 충만한 삶을 사는 법, 자본의 노예로 사는 삶이 아닌, 소박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가 좁다면서 외국을 수시로 드나드는 대신 우리 마을 구석구석의 진기한 이야기나 자랑거리, 그리고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을 즐겼을 것이다.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는 수많은 친구들을 자랑하는 대신, 내 어깨의 짐을 나누어지고 가는 진실한 친구 몇 몇으로 내 방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항생제와 사료로 사육되고, 비인도적으로 도살되어 수입된 고기를 먹음으로써 결국 나의 건강을 해치는 대신, 자그마한 채마밭에서 땀 흘려 키운 건강한 유기농 채소와 곡물을 먹고 이웃과 나눔으로써 나와 이웃의 건강이 더불어 좋아지는 일이 많아졌을 것이다.
대량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이 일상화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어, 자기를 계발하고 완성시켜가는 노동이 일상화된 사회가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 값이 오르내리는 것에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하루하루를 허덕허덕 사는 대신, 오래된 동네 골목과 썩 잘 어울리는 소박한 주택에서 이웃들과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주거 생활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경쟁에 쫓기며 학원과 과외로 내몰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비참한 청춘이 아니라, 함께 여행가고 운동하며 노래하고 그림 그리며 서로 고민을 나누면서 가장 순수한 우정에 가슴 벅차하는, 빛나는 청춘들이 우리를 기쁘게 했을 지도 모른다.
값비싼 로열티를 물고 유전자 조작된 장미를 사서 그녀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부드러운 언덕에 올라가 수줍게 핀 들꽃들의 이름을 같이 불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속도다. 속도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부채 자본주의의 전략에서 벗어나서 안전하게 우리의 삶을 다시 영위할 수 있는 길은, 피크오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속도를 줄이는 데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 롤러코스터처럼 정신없이 우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미쳐버린 속도로 달려가는 부채 자본주의의 궤도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해서, 느리고 여유 있는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회복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빠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고 부채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협했던 그 속도에서 벗어나,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을 돌아보고, 이웃을 돌아보고, 지역을 돌아보고, 국가를 돌아보고, 세계를 돌아보고, 동물을 돌아보고, 식물을 돌아보고, 미생물을 돌아보고, 우주를 돌아보고, 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의 오동통한 뺨과 해맑은 미소, 나비 날개의 오묘한 색깔, 눈이 시리게 푸르른 하늘, 까만 흙을 뚫고 솟아오른 초록빛 새싹과 같은 기적들을 오롯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느림은 부채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날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바로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후회와 염려에서 벗어난 상태, 아무런 걱정 없는 상태.
이 상태는 오늘 성서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느리게 살면서 현재에 집중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상상력을 아주 세밀하게 구체화시킬 때, 우리는 적어도 부채 자본주의의 문화적 코드를 가로질러 대안적인 문화적 코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느리게 살아가면서 현재의 주어진 여건에 늘 감사하며 기뻐하고, 부채 자본주의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현재 모습 이대로도 괜찮다”며 너그럽게 받아들여 다같이 천천히 발전하는 여유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드는 문화적 코드로서의 느림은 우리에게 치유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느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마음에서 우리 이렇게 소리쳐도 되지 않을까? “바보야, 문제는 속도야!”라고.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2012.08.05<이상헌_한신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이 글은 <世界와 宣敎> 제212호(2012.7)에 투고한 필자의 원고를 기초로 다시 작성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