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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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0 09:00:0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는 장사라 할지라도 자기를 자기의 죄에서 구원하지 못합니다. 천하의 이치를 모두 터득한 지혜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죄에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세로도 자기를 자기 죄에서 구원하지 못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이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아니면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들고 다닐 수 없는 것처럼 자기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약 자신의 몸을 스스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와 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이후에는 사울이 예수를 만나 바울이 된 이후부터 더욱 강하게 “그리스도 예수”라고 자주 부르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죽으시기 이전부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편적으로 불려 졌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제외한 사도들에게서 이었음을 밝힙니다.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하게 될는지 모르지만 구약과 신약, 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각만큼이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양인들은 성씨를 먼저 부르고 이름이 불려지는 대신에, 서양인들은 개인의 이름이 먼저 불러지고 성씨를 부릅니다.
  동양인들은 가문과 혈통을 먼저 개인보다 중하게 생각하지만 서양인들은 가문의 중요성보다 개인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양인들보다 서양인들이 개인의 권리와 인격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민주와 자유를 먼저 보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동양인들은 가문이나 혈통에 더욱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논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전에 증거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신 이후에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너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주체인 때보다 그리스도가 주체로 바뀌어 지고 있습니다.
  그런 증거가 바뀌어 진 시점이 어디냐고 성경에서 찾아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심을 본 백부장과 사람들이 “이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선언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기점으로 A. D. 와 B. C. 가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관원이며 지도자였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또 그에게 그와 같은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증거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심과 더불어 일어난 징조도 있었습니다. 그보다도 십자가위에서 죽으실 때에 나타난 사건들은 그에게 불변의 믿음을 갖게 했고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증거보다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하는 증거는 더욱 강하고 설득력이 있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주체가 바뀌는 것이 큰 사건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만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아무에게도 있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바울은 한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택한 그릇입니다.
  하나 뿐인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이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마 24:23-28)고 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이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이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고 영생을 주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속이라는 말은 해방이라는 말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의 어근은 원래 전쟁포로를 위하여 지불 할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를 석방해주는 약정된 속전을 말합니다.
  속전을 받고 죄수와 노예의 사슬을 풀어주어서 해방을 받으면 자유 하는 권리를 얻게 됩니다.
  민수기 18:15,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대속할 것이며”
  구약에서 구속의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구속을 또한 속량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석방이라는 개념으로 바꾸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구속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씌어 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당하게 되고 마귀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 사 보혈을 흘리시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해방하게 하셨고, 마귀의 노예에서 석방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혔던 감옥문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구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받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안에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 안에서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기독교가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갈보리 언덕위에 높이 서있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속하신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위에 서있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각해야합니다.

  마태복음 20:18,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히브리서의 기자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 하듯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 받는다는 사상은 어느 개인의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스도의 자원하심으로 이루어진 사실임을 예언자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과 과분하게 베푸시는 자비를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으로 바뀌어 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러운 죄 값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변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게 되었고, 죄인이 의인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누군가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광지에 가면 때로 공짜로 들어가게 하고는 숫자를 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누군가가 대신 내었기 때문에 지불된 입장료만큼 나의 수도 계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의 길에서 의인의 길에 서게 된 것도 죄 값으로 죽을 입장에서 영생을 얻을 길에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치러진 피 값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치르시기 위하여 이미 창세부터 예정하시고 섭리하셔서 이루신 은혜입니다.

값없이
  이 말은 지금까지 수고를 통하여 얻은 돈을 주고 사서 권리를 인정받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값을 지불하여도 자격이 미달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순종한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행함이 있었던 때문도 아닙니다.
  아무런 공로도 능력도 없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우리는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여러 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였고, 예수님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시며 분부하신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마 10:8)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치 의로운 것처럼 취급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법정의 비유를 들어 하는 말입니다. 의인이라는 비유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법정에 출두해서 무죄라고 판명이 되면 그를 무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첫째로 그를 석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인간은 엄청난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놀라우신 자비와 사랑으로 인간을 무죄한 사람처럼 취급하시고 인정하시고 간주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을 뜻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부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되어 집니다.

  어느 개구쟁이 아들을 둔 어머니가 온몸에 진흙투성이의 더러운 몸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온 아들을 욕실로 데려가 수도를 틀어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흙들을 깨끗하게 씻어 주었습니다.
  씻어준 것뿐만이 아니라 품속에 꼭 않아 주시면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네가 천하에 제일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인단다.”하고 따독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러운 죄로 오염된 참혹한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씻어주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보시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며 의롭다고 택하여 주셨습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 것은 모두 우리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와 허물로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하나님은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으시고 독생자의 피 공로를 먼저 보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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