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신님 글에 대한 답변과 의견

관리자
  • 2322
  • 2012-08-13 22:52:31
1. 핸드폰과 시계가 없어도 약속시간을 정하고 만나는 다른 방법들

순기능이 있으면, 역기능이 있는 것이 작용이 발생하면 반작용이 마찰력을 발생시키면 동반발생됩니다. 저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핸드폰-스마트폰이 지난 2년 사이에 보편되면서 발생시키는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서 종종 고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편리함을 지극히 잘 알고 감지하고 있으면서, 굳이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특히 카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에 등록을 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지극히 난감한 상황들을 잘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마트폰은 노출이 전제되어져야 소통할 수 있는 통신수단입니다. 카톡 같은 경우에 무료로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요금기준의 만족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그 누구인가?에게 스마트폰으로(상대도 카폭같은 모바일 메신저 앱을 깔아 놓은 전제에서) 전화가 오자마자 바로 친구추천 선택의 매뉴얼이 뜹니다.

89년에 처음 대학새내기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소통문화를 떠올려 봅니다. 시간의 정확성으로 모든 걸 버텨내고 있는 소통방식과는 사뭇 달랐다는 느낌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과방에 들리면, 먼저 살펴보는 하루의 일상의 느낌과 단상을 기록하는 날적이라는 노트와 과방 벽에는 보드판이 설치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이나, 학회성격의 모임을 알리는 메모를 날적이에 남기거나 쪽찌에 적어서 보드판에 압정으로 꼽혀져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군대 휴가 나오면 자신의 근무부대 주소를 남기거나, 자신이 학교 어디에 있으니 모두 반갑게 보고 싶다는 쪽지가 붙어 있으면, 그 날 저녁은 자연스럽게 친구들 모임 과 선후배모임 등의 자리가 자연스럽게 열렸습니다.

또한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점에는 더 큼직한 보드판이 설치되어져 있었습니다. 학교 정문을 앞을 빠져나와서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면, 중요한 저녁식사 이후의 자리들과 모임들이 어떻게 진행될 예정인지 파악할 수 있었고, 다른 건물에서 공부하는 타 단대나 타 학과 학생들끼리도 충분히 소통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런 소통방식이 만남방식이 지극히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저는 이 소통방식이 오히려 바람직했던 이유는 만남과 소통에 윤기를 드러내는 기다림의 축적이 자연스럽게 스며 들수 있었기에 훨씬더 애틋하고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만남과 소통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편지같은 경우는 보통 매주 발행되는 학보에 편지지를 안으로 접어서 넣고, 적절하게 테이핑을 하고 고등학교 동창이나 알게 된 타학교 친구들에게 보내면 일주일이 지나서 (서울지역에서 좀더 먼지역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학보안에 편지지를 곱게 써넣고 테이핑을 한 그 수신자의 학교의
학교신문과 편지를 함께 보게 됩니다.

같은 학교에 타학과의 여학생과 남학생이 마음에 들면, 약간의 닉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우표값의 부담조차 없이, 메일박스에 고운 편지지로 적어서 서신교환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2.지금은 공중전화기가 거의사라졌지만, 삐삐가출현했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군대를 가까스로 만기전역을 하고서 경기도 이천 고향집에 도달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소천하셨고, 여러가지로 난감한 상황들이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속출되고 있었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 데, 만남의 최소비용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태는 피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 다시 말해서 과외를 해야 겠다는 판단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도 벼룩시장 가로수를 비롯한 광고신문들이 있었지만, 연락할 수 있는 접근성을 최대한 키우자면, 저에게도 삐삐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가로수라는 광고신문에 수학영어 과외 광고를 만오천원을 주고서 게재했고, 결국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연결이 되더군요.

당시의 삐삐문화는 적지않은 이들이 공중전화 앞에서 줄을 서게 만들만큼 지금의 커피점으로 치자면, 삐삐호출전화비 꽁짜 하는 곳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던 세월이였습니다.

인터넷은 96년을 기준으로 시나브로 활성화되기 전이였고, 당시의 1994~6년 기준 대한민국 20대의 문화로는 삐삐와 피씨통신이 대세였습니다. 제 남동생이 공대출신이여서, 군대를 94년 3월 전역하자 마자, 피씨통신에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매달 만원의 사용료를 내고 천리안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가입해서 여기저기 전국 각 지역에 분포되어져 있는 천리안 회원들에게 쪽찌성격의 글을 보낼 수 있었고, 대화방을 만들어서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환경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실감이 나지 않다고 2,30대 세대들은 이야기하겠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이 체험이였습니다. 영화 <건축학 개론>을 잘 살펴보면 이 문화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뚜 뚜뚜뚜~ 삐삐삐 삐리릭~ 하면서, 전화기선에 연결된 모뎀을 통해서 접속했던 그 체험은 지구를 벗어난 우주인들이 타 외계인들과 교신하는 듯한 느낌이였습니다.

그래서, 외대부근도 가보았고, 대전의 카이스트도 가보았지요. 당시는 마법의 성이라는 곡이 일대 대 히트를 쳤던 상황이였는 데, 함께 노래방도 들려 봤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동호회 noya후배가 프로그램화한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인터넷 싸이트가 폭팔하기 전에, 저는 결혼을 했고,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는 모임을 찾다가 당시 삼성 SDS에서 운영하는 가장 탁월한 접근성을 제시하는 <유니텔>이라는 피씨통신 회사에 가입해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동호회의 폭팔을 삼성 SDS는 적지 않게 지원을 했고, 당시 천리안 하이텔을 추월하고, 대한민국에서 피씨통신 써비스를 제공하면서 <인터넷> 네스케이프의 검색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인터넷에 접근하는 최초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각 PC통신 회사건물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이 엄청난 대세로 접어 들면서, 홍대 앞의 둘째 딸의 돌잔치를 했던 <싸이버 스토리>라는 공간은 엄청난 속도로 인터텟을 접근하는 환경이 제공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속도는 스타 크래프트를 원조로 다양한 온라인 게임들을 자리잡게 하였고, 그 피씨방의 엄청난 속도들은 이런 원격접속을 가능케 유지시켰고, 이 속도는 메가에서 기가로 기가에서 테라로 이제는 페타로 가고 있습니다.

3. 011,017,018,019의 혁명적인 등장이후 010의 통합까지

90년대 초중반에도 벽돌같은 엄청난 부피와 무게의 핸드폰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당시 90년대 초중반에 드라마에서 등장했던 카폰이 이런 형식이였을 거라고 봅니다. 그 이동통신을 한국이동통신 작금의 현실에서 논하자면 SK텔레콤이 독점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 사업자가 017 신세기통신이라고 불렸던 시절이였습니다. 그러나 1997년에서 1998년으로 접어들고서 소위 말하는 PCS라는 이통통신회사들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은 이제 통신강국이니 뭐니하면서 순식간에 항상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점령해 버리는 대한민국 문화는 이동통신 수단에 대해서 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밀레니엄 2000년이 접어들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반 가량이 이동전화 번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다양하게 분석해서 볼 수 있는 여지는 널려있지만, 제가 문화적인 트렌드에 준해서 보자면,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는 20대 초 여성친구들과의 사연을 인천이라는 지역을 입체적으로 톱아 보면서 드러낸 이 영화를 집중해서 보면, 적지 않게 드러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감신출신이고 저와 비슷한 사십대 초중반입니다. 과는 종교철학과출신으로 알려졌지요. 이 여류감독은 결정적인 메세지를 문자메세지의 80바이트내로 압축시켜서 영화가 진행되는 흐름 곳곳에 배치합니다. 지금은 무지막지하게 장문의 문자메세지도 날릴 수 있고, 카톡같은 모바일 메신저를 사용하자면 비용부담없이(?) 무한대의 메세지를 날릴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 당시의 문자 메세지는 메세지를 최대한 압축해서 전하는 방법에 대한 사용자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던 상황이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흔하게 접하는 ^^나 ㅠㅠ 같은 이모티콘도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때부터, 말로 소통하는 이동통신의 전화의 기본적 통신요금기준과는 다른 요금기준에 대한 적지않은 산정기준책정에 대한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지점과의 이견들이 제시되었습니다. 흔히 문자 100개를 날릴 수 있는 문자를 알로 치환해서 문자 백알 무료 서비스 200분 무료통화라는 보너스들이 상품의 미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론, 직접 음성을 듣고서 통화하는 소통과 단지 문자 메세지로만 교신하는 소통은 엄청나게 다른 것 같습니다. 감게에서도 그 사람의 글을 보면 이 사람이 이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데, 직접 그 사람을 만나서 직접 서로의 육성으로 접하고 소통하고 겪어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평가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후로, 대한민국의 이동통신가입자는 계속해서 폭증하게 되었고, 이제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입장에서 대한민국 인구보다 이동통신사에 가입한 가입자가 더 많은 현실입니다.

4. 작금의 스마트폰이 초래하고 있는 현실들에 대한 단상.

a.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입학하는 특히 남자 아이들같은 경우에 닌텐도가 대세였습니다. \"친구는 있는 데, 나만 없어서 왕따야\"해버리면 부모는 큰 고민없이 닌텐도 게임기를 구입해서 챙겨주었습니다. 작금의 스마트폰 환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스마트폰의 부작용을 잘 알고는 있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식이 왕따를 당한다고 이야기하면 바로 주말에 스마트폰을 구입해 줍니다. 그런데, 닌텐도 게임기와 스마트폰이 완전히 다른 차원인 것은, 닌텐도 게임의 저장용량을 기준으로 스마트폰은 그 1000배의 저장용량을 가지고 다양한 기가막힌 게임들을 제공합니다. 그뿐 아니라 실시간으로 다른 친구와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닌텐도의 중독성도 그 폐해가 5~6년 전에 이미 지적되었지만, 그런 차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특히 카톡같은 모바일 메신저에 맛을 들리면,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축구를 하고 몸을 움직히면서 소통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동아리를 형성합니다. 흔히들 카폭을 문자메세지 비용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우선 보지만, 카폭은 인터넷 메신저인 예를 들어서 네이트온 보다 더 엄청난 중독성을 가진 채팅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학년때부터 여기에 길들여지게 되다 보면, 그 종국은 어설픈 게임중독의 폐해보다 더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채팅안에서의 말싸움(실제로 글을 입력해서 싸우는 것이지만) 여기서 예를 들어서 많게 30여명 적게는 10여명 사이에서 자신이 카톡채팅싸이트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따로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똑 뿌러지게 이야기하는 친구 있다면, 그를 끌어 내리기 위해서 작전을 짭니다. 그리고 공개적인 채팅방에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이런 행태들을 그대로 자행합니다.

b. 3주 전 경향신문에서 특집으로 4식구 부부와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두 아들의 네 가족이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한지가 일년이 넘어가는 상황들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역효과에 대한 치료와 극복의 차원에서 온가족이 모두 일주일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정치하게 관찰하고 제시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거의 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5학년 형은 3일만에 3학년 동생에게 엄마 아빠에 대해서 자신의 학교에서의 일상에 대해서 친구들에 대해서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또한 서로 장기도 두고 체스도하고 직접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고 서로의 표정을 바라보는 오프라인 게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성향과 경향이 초등학교 아이들만 유독 두드러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결혼해서 집들이에 가면, 화장지나 기타등등 필요한 품목을 구입하고서 찾아가서 함께 식사하고 그동안 밀렸던 정다운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였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집들이를 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 까지는 동일한 듯하지만,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대부분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스마트폰에 접속해서 터치~에서 터치~를 반복하다가 결국 시간대 별로 헤어지는 것이 일상화되어가는 풍경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c. 유독 이런 현상은 20대,30대 초반에서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일 것 까지도 없고, 일상적이라할 수 있는 이런 풍경도 보편적으로 감지됩니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스타벅스 톰앤톰스 파스꾸찌 커피베네...등등의 커피점이 들어서기 전에는 저 공간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 공간이였을까? 헷갈릴 정도인데, 이런 풍경은 일상적입니다.
팔짱을 낀 남녀 커플이 이런 커피점 안으로 들어 옵니다. 드어 오자 마자 커피를 주문하고 몇 마디 이야기 나눌 사이도 없이, 스마트폰이나 무선인터넷이 가능한 테블릿 피씨를 꺼냅니다. 그리고 서로 터치 터치 합니다. 그리고 좋은 조건으로 만나자고 하는 다른 남친?이나 여친?의 메세지가 스마트폰에 뜨면, 먼저 자리를 뜹니다.
스마트폰이 생겨나면서, 대한민국 10대 말 20대 30대 40대 결혼하기 전의 미혼의 연애관계에 혁명적인 현실이 초래되었다고 조금은 과장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던 칼럼리스트의 관점을 그대로 전제한다면, 카톡같은 모바일 메신저로 동시에 4명까지는 작동적인 어려움이 없으면 관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더 극단적으로 보자면 이런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제가 봐도 과장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도 확인한 바가 있음으로 그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

결혼식 도중에 결혼식을 갈무리하면서, 신부가 눈물을 흘립니다. 이전에는 이런 풍경을 접하면, 키워주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울컥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였지요. 그런데, 이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고, 실제 이런 느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들이 엄연하게 존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이 신부는 A B C D 네명의 각기 다른 남자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상황과 조건들을 숙고하고서 C와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하는 과정에 접어 듭니다. 그런데, 결혼식 도중에 갑자기 울컥하고 아~ 이제는 C가 줄수 없는 A만의 B만의 D만의 나를 사랑하고 챙겨주는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그 단절감이 눈물로 흘러 내린다는..... 어쩌면,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는 여지도 농후합니다.

이런 현실은 앞으로 더 강화될 여지가 큽니다. 이런 보편적이다 시피할 정도로 나름대로 스마트폰을 최대한 활용해서 시간을 절약하고 소통의 문법을 단축시키셔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것이 돈이든 그것이 사람이든 획득할 수 있겠다는 심사로 달려 들어서 결국 하나의 신드롬이나 트랜드도 아닌, 고착화된 현실로 가게 되는 상황 속에서 2.30대부터 문명이 테크놀로지의 최첨담의 산물들이 인간의 관계를 극도로 표피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고의 중심에는 아주 단순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보다 ㅉㅏㄻ은 시간안에 스마트폰을 등을 통한 최첨단의 기기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현실을 이뤄낸다~ 바로 이런 사고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d. 다른 한편으로 이런 일상이 보편되면서 초래되는 사이버내의 상황이 현실을 저당잡는 것 이외에도, 이런 상황들이 속출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아이들에게 보편화되는 과정 속에서 건널목 교통사고가 수직적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건널목에서는 좌우를 살피고 신호등을 보고서 건너야 한다고 해도, 스마트폰이 시선을 빼앗고 있는 상황에선 무력합니다. 적당하게 보이지 않는 듯하면, 초록불이면 건너고 남들이 건너는 듯하면 건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담한 것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과정이 끝나고 집으로 보내는 승합차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귀가 승합차에는 반드시 2명의 교사들이 탑승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각지대를 살피고, 집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아이들을 하차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살펴야 합니다.

3주 전, 목요일 오후 1시경에 만리재 앞 행단보도에서 일어난 사고 입니다. 아이들을 하차시켜야 하는 장소에 익숙한 귀가지도 여교사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들고서 터치를 하면서, 아이들을 하차시켰습니다. 만리재 앞 건널목에서는 두명의 7살 남 녀 아이들이 하차했습니다. 남자아이는 키가 매우작은 편이였고, 여자아이가 먼저 내린 후, 천천히 내리는 중이였습니다. 한쪽에 치우쳐 아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스마트폰에 열중했던 귀가지도 교사는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판단하자, 아직 아이는 엄지손가락 외에 네 손가락을 문틈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상황이였는 데, 귀가지도 여교사는 승합차문을 쾅 닫아 버렸습니다. 아이는 네 손가락은 으깨져 버렸고, 손가락치료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5. 이제부터 박준신님의 글에 대한 본격적인 입장을 개진합니다. 태양과 지구와 달의 실증적인 천문물리실증적 차원에서는 숫자적 치환은 동일하지만, 태양과 지구와 달이 아주 다양하게 인류의 문화 속에 반영되어져 왔고, 그것은 그 나름의 맥락을 읽어내는 전제에서 보면, 더 적절하고 타당하다는 관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쌍수들고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 싶은 차원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지구에 있는 한 태양과 달을 대상화시킵니다. 사실, 인간의 전지구적 시야에서 올림픽 같은 경우도 런던이 전 지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그리니치 천문대 있음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태양계를 넘어서, <콘택트>같은 영화에서 조디 포스터가 이 엄청난 우주 공간 안에 지구에만 인류가 존재하는 것은 낭비일 수 있다고 엄청난 천파망원경을 견학하러 온 초등학생의 질문에 \"다른 외계에도 생명체가 있을까요? \"라는 질문답했던 전제에서 보십시다.

태양계, 다시 말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항성과 위성이 존재하는 이 시스템의 체계를 몇 억광년 떨어진 곳, 구체적으로 우리가 밤하늘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빛 나는 그 별에서 태양계를 보고 있다면, 극단적으로 태양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존재했던 시절의 발광체들이 그 곳에서 감지되기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이 지점들을 명확하게 설명하려면, 지구의 중력의 곡률을 설명해야 하는 데, 이렇게 되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의 차이와 관찰이 관찰대상에게 영향을 미치는 칸트철학으로 비유하자면, 인식론과 존재론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인식론의 전제에서 존재론이 달라질 수 있음을 논해야 하는 데, 이렇게 되면 한도 끝도 없는 글쓰기가 진행될 수 밖에 없으니 일단 생략하고 논하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런 비유를 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라면박스같은 상자 안에, 중심에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심체가 있고, 그 주위를 각 항성 행성마다 일정한 주기로 도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왕성 명왕성(?)이 돌고 있습니다. 또 지구에는 하루를 주기로 달의 역할을 하는 자전은 하지 않지만 공전은 하는 물체가 아주 정밀하게 돌고 있다고 치십시다. 사실 인터넷 과학자료싸이트에 가면, 이런 장치들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태양과 각 행성과 지구와 달과 크기의 비율을 최대한 맞추어서 라면상자안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라면상자를 전제하자면, 우리는 그 태양을 매일 자전하는 지구의 어느 위치에서 실증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겠지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시간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태양계만을 전제하고 태양과  각 행성과 지구와 달 같은 위성만을 고려한 사고체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의 우주항공역량이 태양계를 벗어 났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체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해가 뜨고 밝아지고 지구대기의 흐름으로 우연적인 구름이 발생하고 암컷구름과 수컷구름이 합생하여 비를 내리고 우기에는 장마가 오고 건기에는 거의 내리지 않아서 건조한 기후이고, 이런 익숙한 전제들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라면박스안의 태양계를 전제하자면, 시간은 하루 24시간이고 23.5로 기울어져 있기에 춘분과 추분과 하지와 동지가 있고 이렇게 규정합니다. 하지만, 이 태양계의 라면박스를 벗어나서 보자면, 지구의 24시간이 정말 유효한 것일까요?

이는 지구가 형성과정을 연구해온 지구과학자들의 설득력있는 관점을 반영해 보자면, 더 재미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형화한 태양과 지구와 달의 크기는 원래부터 현재의 크기였을 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당시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는 더 빨랐습니다. 따라서 시간은 초당 양적으로 분석하자면, 지구에 생물체가 들어서기 훨씬 전 초기에 따르면, 현재의 시간을 기준으로 지구는 24시간이 아니라, 17~18시간정도 되었습니다. 달의 크기또한 달랐고, 자전은 하지않고 공전만 하는 달의 부피와 지구 중심의 공전주기도 달랐습니다.

박준신님께서 실증적인 천체물리학적인 수치를 말씀하셨는 데, 그것은 태양과 지구와 달의 서로의 관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자체만을 진공적인 상태에서 불리시켜서 본 수치입니다. 자~ 이제부터 제 본격적인 의견개진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태양과 지구와 달과의 거리감의 유지가 주는 천체물리학적인 또 어쩌면 인간사의 관계론적인 측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지구가 변함없이 언제까지나 태양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할 거라고 보는 천체물리학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뉴턴은 이 발견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서, 신의 은총의 만류인력이 태양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사유를 해볼 수 있는 지점은 지구와 달의 관계에 있습니다. 2007년 말 이명박 대통령 당선전 허베이스피리트호가 납득될 수 없는 이유로 좌초되면서 서해안은 엄청난 기름때로 얼룩졌고, 기네스북에 신기록을 남기면서,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교회 단체할 것 없이 검은 기름때를 제거하기 위한 자원봉사가 두달간 지속되었습니다.

지구와 달의 관계의 핵심은 주역에서 논하는 측면에서의 8가지의 달의 모습에 준한 측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극단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달이 없으면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밀물과 썰물을 통해서 바닷물이 계속해서 저류와 중류와 상류가 계속해서 순환하고, 또 적절한 때 태풍이 불어서 심층수까지 다시 정화시킬 수 있는 체계가 유지되지 못하면, 바닷물은 생명을 다합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한 달의 공전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지구생태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근간입니다. 최근에 화성에 착지해서 본격적인 탐사가 이뤄지고 있지만, 우주탐사에서 제일 관건은 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그런데, 아주 미묘한 차이가 태양과 지구와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합니다. 말씀하신 실증적인 수치로 논하자면, 매년 마다 다시 말해서 라면상자안의 태양계안에서 일년 365.2422일 동안 지구와 달은 약 3.8cm가 매해 멀어집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멀어짐이 지구와 달의 인력과 척력의 끌게장의 범위를 벗어날 때, 달은 지구 궤도를 벗어날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이 초래되면 지구 바다위의 밀물과 썰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대기에 영향을 미치면 생명체는 불과 2달이면 모두 미생물 이외에 곤충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박준신님께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관계는 가까와 질 수록 아주 친밀하다고 다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과 지구가 너무 칠밀해져서 공전의 주기율이 점점 가까워지게 되면, 태양은 모르겠지만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와 달도 동일합니다. 지구와 달이 점점 가까워져서 달 하루에 한번 정도가 아니라 두번씩 공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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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 저는 서로의 거리감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에 어느순간 자각점이 소실되어서 실패하다가, 너무친밀해 지긴 했는 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되는 상황을 적지 않게 봅니다.

라면상자의 태양계를 예를 들었지만, 만일에 인간의 의식과 영성이 라면상자의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지구 공전 자전의 하루와 일년의 시간의 척도만이 유일한 것이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보다 빨리 실현시키고 싶은 초조한 안달감과 조급증으로 적절하게 유지해야 하는 관계의 거리감을 무리하게 조정하려고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태양계의 라면상자를 벗어나자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다고 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의 이런 비유를 들어 보지요. 보통 주말에 연대나 홍대 부근에 가면 수없이 많은 인파들이 넘쳐 납니다. 그 가운데에서 예를 들어서 신촌로터리에서 연대 앞을 간다고 치십시다. 어찌하여 약속시간은 얼마남겨져 있지 않고 길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황에서 서두른다고 해도, 앞으로 갈 수 있을까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계속해서 부딪쳐서 너 난감해 질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의 보폭의 페이스에 자신을 맞추고 그 리듬을 일상화시키면서 함께 걷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속에는 한달이니 두달이니 어떤 한계를 제시하고 3년의 고삼시절후의 수능결정판 이런 문턱들이 결국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을 떠나서, 자신을 압도하게 만들고, 모두 그 파시스트같은 속도감 앞에서 시간을 숭배하는 신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서로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를 인정하고서 서두르지 않고서 서로의 거리감을 존중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멀스멀 찾아오는 서두름과 조급증과 안달증을 자각하는 그 거리감의 미학이 저에게는 태양과 지구와 그 행성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와 달의 거리감이 창조하는 냉철한 아름다음일 듯 합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속도감은 곤혼스럽게 소통과는 관계없는 서두르는 메세지들은 난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거리감의 유지에 대해서는 깨어 있을 수 있는.....  

ps. 의도하지 않았지만, 글이 너무 길어 졌지만, 충분히 제 의사를 파악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유가 필요할 뿐이고, 그 전제에서 저도 관련된 모든 분들의 선의의 진정성을 확신하기에 잘 해결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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