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실패 중에 성공하신 분
관리자
- 1789
- 2012-08-16 09:00:00
시편 88:1-10, 마태복음 26:47-54.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성공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로에는 성공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바라는 목표와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이룩하고 성공해야 그 사람은 만족하고 쾌감을 갖게 됩니다.
성공해야 기쁨이 있고 실패하게되면 실망하고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던지 꼭 성공하기를 원하고 바랍니다.
사업에 성공을 원하고 학문에도 성공을 바라고 정치에도 삶에서도 성공을 꿈꿉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성공이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며 가장 처참하게 죽은 사람이 있으니 누구입니까?
그는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비하여 가장 많은 실패를 당한 사람입니다.
짧은 인생의 여정가운데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실패로 시작해서 실패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실패를 하셨습니까?
1, 그는 출생시 방을 빼앗긴 분입니다.
기원전 제 4년 중동과 아프리카와 유럽을 지배하던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가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나사렛에서 살고있던 요셉도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상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호적을 하러 가게됩니다.
그때 마리아는 산고가 그의 찬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멀리 베들레헴까지 호적을 하러 간 요셉과 마리아는 그날 밤 거처할 방을 구했으나 여관마다 만원이어서 도저히 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던 그날 밤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방을 얻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마구간을 빌려 말구유 위에서 산고를 치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이렇게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 왕궁의 호화로운 내실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부자 집 안방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주만물의 주인 되시고 섭리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고관 대작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만민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그나마도 여관 방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이렇게 초라한 말구유 위에서 천하고 천하게 출생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산고를 치르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과 짐승들이 거처하는 곳은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우리 나라 영웅전이나 위인들을 소개하는 글을 읽으면 첫 머리에 언제든지 신비로운 태몽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또 태어날 때 이상한 하늘의 징조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유달리 우렁찼다거나 아기의 남다른 행동이나 모습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낮고 천하게 출생하셨으며 이처럼 비천한 가운데 태어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20,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듯이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산고를 치를 방 한 칸 없이 빌린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출생 시부터 최소한의 인간의 거처인 방 한 칸까지 빼앗기신 분입니다.
2, 생명의 위험으로 쫓겨가신 분이십니다.
빌린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은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생명의 위험 가운데 어린 핏덩이의 몸으로 살인자의 칼을 피해 먼 애굽으로 피난을 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동방의 박사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연구하던 중에 메시아의 출생을 알리는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들은 멀-리 동방에서부터 그 별을 따라 팔레스타인 땅까지 왔지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하고 말하자 온 예루살렘 성안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간교한 헤롯은 그 말을 듣고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박사들은 “성경에 예언하기를 유대의 베들레헴입니다”하는 말을 듣고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가서 아기에게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기를 죽이려하는 그의 간교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박사들이 왕궁에서 나오자 그들을 인도하던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따라가서 아기를 만나 경배하고 황금과 유황과 몰 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서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속은 줄 알고 무장한 군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어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살인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미리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게 현몽 하기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헤롯의 간교한 계획과 술수를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지시하는 대로 그 밤에 즉시 일어나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가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악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출생되신 며칠 후 걸음마도 배우기 전 엄마 아빠 한 마디 말도 불러보기도 전 이 땅의 왕 헤롯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살인만행의 칼을 피해 도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헤롯에게 원수진 일도 없고 손해 끼친 일도 없고 모함한 일도 없었지만 생후 몇 일 만에 생명의 위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피난을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칼을 피해 도망을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3, 그는 또 고향을 빼앗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가 고국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 왔지만 예수님은 태어나신 태의 고향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리에서 자랐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도의 한 성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57마일, 갈릴리 바다에서 서남쪽으로 12마일에 위치하며 사방에 산이 둘러있는 골짜기로 토질은 모래땅입니다.
이 성의 주민은 본래 무식하고 악하고 풍습이 추잡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멸시를 받았는데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 부른 것도 역시 멸시하려는 뜻이었습니다(마 2:23, 막 1:24, 10:47).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때부터 나사렛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나 병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베들레헴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나사렛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4, 그는 설교에 비평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는 자연과 실생활을 주제로 하여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가르치신 생명력이 있고 활기가 넘치는 설교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산상보훈의 설교말씀만 보아도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응용되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인간 처세에 대한 말씀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대중을 사로잡는 포용력과 매력이 넘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고 광야나 들판이나 집안이나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때로는 자리를 따로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비평하고 조롱하며 멸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시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중의 어떤 사람들은 “참람하다”고 비난과 책망을 하며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했고 돌로 치려고 까지 했습니다.
5, 능력으로 기적과 이적을 행하였으되 비판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시기에 어떤 이적과 기적도 모두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불치의 앉은뱅이나 소경이나 한 편 손 마른 사람이나 문둥병자 까지 모두 치유하셨습니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비난하였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막 20-30).
병들고 불쌍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모함하는 자들의 눈에는 못마땅한 일로 보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지 못하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놀람과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하겠으나 오히려 그들은 비난하고 정 죄 하는 일만 하였습니다.
6, 그는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였으되 자신은 주리신 분이십니다.
광야와 빈들에서 5천명의 무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것이 12 광주리에 차고도 넘쳤습니다(요 6:1-15).
또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가 남았습니다(눅 8:1-1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이적도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사탄 마귀가 찾아와 유혹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이 돌들로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사탄을 물리 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다가 너무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열매를 찾기 위해 나무의 잎을 헤쳐보실 정도였는데도 자신이 먹기 위해서는 먹을 것을 나타나게 하는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7, 그는 모친과 아우들에게 미@ 쳤다는 오해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30세 까지 사생활을 마치시고 인류 구원을 위하여 공생애를 보내실 때에도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예수님을 미@ 쳤다고 찾으려 왔던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무시지도 않고 잘 잡수시지도 않으면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여러 곳으로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볼 때 정신없는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쉬지 않고 늘 말씀을 전하며 다니시는 예수님은 옷을 빨아 입을 틈이 없어서 더러웠을 것입니다.
잘 잡수시지 못한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하셨을 것이고 온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쉴새없이 여행을 다니시느라 피곤에 지친 예수님의 두 다리는 걸어 다닐 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잘 간수하지 못한 그의 머리는 길게 늘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얼굴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는지 유대인들이 “네가 50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한 것을 보면 많이 늙게 보였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요:57).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셔서 나이가 50여세나 된 것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예수님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사람들의 전하는 말만 듣고 미 @ 쳤다고 데리러 왔던 것입니다(막 3:21).
사람들에게 미@ 쳤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신없는 줄 알고 찾으려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나의 모친이며 형제냐? 나의 모친과 형제를 보라 나의 모친과 형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막 3:31-35).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혈통으로 가족과 혈통을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믿음 안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가족 관계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았어도 사탄의 행사를 하고 있는 이들은 사탄의 후손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8, 남에게는 평안과 쉼을 주시되 자신은 조금도 쉬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셨으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
인자한 음성과 사랑의 손길로 영접하시겠다는 주님의 사랑은 인류에게 안식을 주셨으나 자신은 고달픈 생애를 살면서도 조금도 쉬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날 때 육신을 지닌 예수님도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무섭게 요동하는 배 위에서 세상 모르고 주무셨습니다(마 8:24).
사마리아 우물곁에서 피곤한 몸을 앉아 쉬다가 물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은혜를 받아 동리에 들어가 “오늘날 선지자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요 4:2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며 임박한 세상 종말을 앞두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 구원하려고 쉬지 않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휴식시간은 기도하시는 시간이며 말씀을 전하시는 시간이며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쉬시려고 한적한 곳을 찾으셧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쉬려고 한적한 곳을 찾으시는 그곳까지 찾아왔습니다.
9, 불치의 병자들을 치유하셨으나 외면하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는 한 사람이요 9사람들은 은혜도 모르고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눅 17:11-19). 은혜를 베풀었으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요 아홉은 받은 은혜를 헌신짝 버리듯 던져 버리고 가버린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잇느냐?” 탄식하시고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통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웃의 은혜, 스승의 은혜, 부모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흔히 잊고 삽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10, 기도하고 택하여 세운 제자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고 믿어서 재정까지 맡겼던 가롯인 유다였으나 그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욕심을 두고 3년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스승을 은돈 30에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심이 변하는 것인가요?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 존경하는 것처럼 충성하였던 가롯인 유다가 예수님께 신임을 받아 재정까지 맡았는데 물질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돈을 만지니까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돈 몇 푼에 자기의 지조를 굽히고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인가요?
그는 결국 끔찍한 죄를 지어 인류의 배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활하고 악랄한 사람이요 패 역한 저주의 대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택해서 세운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고 팔렸던 것입니다.
배반자는 입을 맞추는 것을 군 호로 하여 원수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사랑의 입맞춤이 아니라 배반과 패 역의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먹은 반역자입니다(마 26:48).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죽는데 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장담하더니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작은 계집종에게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는 네 집안에 있다”고 말씀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외정시대에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음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이상재 선생은 이완용에게 “차라리 당신은 일본에 가서 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이 일본에 가서 살면 조선을 망하게 한 대로 일본을 빨리 망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11, 왕이시면 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만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참혹한 십자가에 높이 달려 고통 당하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네 가 그리스도여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너를 믿겠노라\"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고 기뻐 날뛰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요 마귀가 보기에 승리했다고 즐거워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승리로 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창세기 3:15, 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라고 예언을 합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여인의 아들의 발꿈치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계교를 깨뜨리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와 허물을 사하셨으며 멸망과 죽음의 권세를 부시고 저주와 사망의 진노를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우물을 파려면 사람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우리 예수님은 음부에 빠진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죄악 세상에 오셔서 진노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12,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하신 중에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일생이 실패의 연속이요 마귀가 승리한 것으로 보였으나 오히려 이 모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당한 실패들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절망과 실패로 끝난 일생은 온 인류에게 성공으로 이끄시기 위한 섭리이셨습니다.
2 천년 후의 오늘 우리 인류는 오히려 실패자로 여겼던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게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위로 받고 예수님을 통해 기도하고 예수님을 통해 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왕이시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이시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말구유에 오신 실패자 예수님은 오히려 역사가 흐를수록 성공을 거두어 그의 나라는 확장되고 주의 복음은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마귀는 역사가 흐를수록 위기와 실패를 당하고 그의 권세는 파괴되어져 가고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고통 당하시던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욕하던 무리들은 결국 자신들의 저주와 통곡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상에서 실패하신 예수님이 아니고는 천하에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실패하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실패하신 예수님이 아니고는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4:12, “천하에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는 예수의 이름만 들어도 줄행랑을 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