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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심정으로 쟈스민 혁명을 되새겨 본다
박기창
- 1879
- 2012-08-27 08:59:28
쟈스민 혁명이란 2010년에서 2011년에 걸쳐 튀니지에서 일어난 국민결합대운동으로 튀지니의 국화인 쟈스민을 상징하여 쟈스민 혁명으로 부른다. 이 운동이 이집트로 확산되어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하고 리비아, 시리아, 예멘, 바레인, 수단, 터키 등 중동 전역에 퍼져나가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목도하고 있다. 이 운동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억압된 마음을 연결하는 일종의 신경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작은 그룹이 조직되고 이들이 행동에 나서고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에 의해서 운동의 크기는 삽시간에 나라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쇼셜 웹(Social Web)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심장부인 윌스트리트에서 일어났고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금융산업과 치솟는 실업률에 불만이 폭발하여 99%가 1%의 상류층 거리를 점령한다는 의미의 시위가 뉴욕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시위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전세계 82개 국가의 95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캐나다의 행동주의 그룹인 애드버스터즈(Adbusters)에 의해 시작되어 ‘99% 대 1%’라는 슬로건을 전세계로 퍼뜨렸다.
위 혁명의 중심에는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불타오르는 감정이 있었다고 본다. 본인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목도하면서 오늘의 감리회를 바라보고자 한다.
지난 4년 여의 아픔이 지금도 가시지 않았는데 또 다시 똑같은 전철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면서 이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기인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소셜의 철학이 사회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인물인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Haward Schultz)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이 나라에서 신뢰에 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워싱턴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워싱턴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기다릴 수 없다.”라고 한탄을 했다.
되돌아보면 오늘의 감리회 사태 중 근본적인 원인들 가운데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감리회 중심에 있는 소위 일부 리더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감리회 사태가 촉발될 때 정의에 입각한 상식적인 이치와 도리를 짓밟았고, 존재의 기초가 되는 틀(법)을 깼으며, 감리교도 모두가 공유해야 할 정당한 몫(질서를 통해 얻어지는 것들)을 빼앗아 가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똑같은 전철을 리더들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중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가? 정치인가? 학연인가? 인간관계인가? 이 모든 것보다 먼저가 기독교 대한 감리회를 질서 위에 세우는 일 아니겠는가? 감리회를 일으키는 일에 당당할 수는 없겠는가? 머뭇거리지 말라. 우리 모두가 감리회를 사랑하지 않는가?
125년여의 역사를 지닌 감리회가 통곡하고 있는 것 같다. 160여만의 감리교도들이 당신들 때문에 고통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가? 언제까지 통곡하며 눈물을 흘려야 그만 둘 것인가? 오죽하면 집단소송이라는 극약이 처방되고 있는가?
당신들이 앞으로 계속 납득할 수 없는 행태들을 보인다면, 총회 앞에, 연회 앞에, 지방 앞에, 개 교회 앞에 그 누군가가 깃발을 꽂을지도 모른다. 쟈스민혁명의 물결이 당신들을 덮칠지도 모른다. 왜인가? 자랑스러운 감리회를 살리기 위해서다. 극단적 행동을 앞세울지 모르며 더 이상 감리교도들이 머뭇거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깨져야만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숨을 쉴지도 모른다.
호소하고 싶다.
마음을 비우고 법질서를 앞세워 감리회를 살려 달라고...
위의 격한 감정표현에 용서를 빈다. 이런 표현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소인은 다시 한 번 용서를 빌고 싶다.
이 글을 접하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크신 복 임하소서.
새천년교회 박 기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