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나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있는가?
관리자
- 1988
- 2012-08-29 09:00:00
아버지가 그 동안 저축해 놓으셨던 돈을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빼서 우리 다섯 식구가 근근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아현동에서 잠실 주공아파트 3단지로 이사를 오면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상가교회였습니다. 교인이 1백여 명쯤 모이는 아담한 교회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은 교회에 나가자마자 등록을 했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교육전도사 자리였습니다. 파트타임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교회는 다른 교육전도사가 두 사람이 있어서 더 이상 교육전도사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두어 주가 지나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야, 그러면 여기가 잠실이니 여기서 가까운 E교회 K목사님께 찾아가서 교육전도사 자리 한 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보면 어떻겠니?” E교회 K목사님은 평소 우리 부모님이 잘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저도 몇 차례 뵌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가 철원에서 살 때 한 마을에서 살기도 했고, K목사님이 개척하실 때 나의 아버지께서 작은 도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규모도 크니까 찾아가서 부탁하면 밑져봐야 본전이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얘기를 듣고 E교회 K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K목사님은 다행히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집이 잠실로 이사 오게 된 저간의 경위와, 내가 지금 교육전도사 자리를 구하고 있는데 목사님께 도와주실 수 있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지요. K목사님은 내 얘길 다 들으시고는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마침 중등부 전담 교육전도사가 필요해서 사람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번 주일부터 오라고 하셨습니다.
K목사님은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화통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쁘니 찾아올 필요는 없고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인사하고 그 때부터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을 한 꺼풀 벗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가정의 장남인데, 병드신 아버지를 뵙기도 죄송스럽고 한 푼이라도 벌어 집에 보태야 하는데 뒤늦게 신학에 입문해서 건달처럼 지내고 있으니 늘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주일날 아침 나는 머리를 감고, 단벌 양복을 입고 외관을 갖추고 E교회 주일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교회 주보에는 새로 중등부 전담 교육전도사가 오게 되었다며 내 이름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시고 광고시간에 내 이름을 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교인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우리 교회에서 일하게 된 교육전도사니, 여러분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자리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K목사님은 눈길 한 번 안 주셨습니다. 교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시고 교인들이 다 빠져나가자 그제서야 K목사님은 나를 힐끔 보시더니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관이었습니다. 20평 정도의 넓직한 공간이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목사관에는 저 말고 K목사님의 친구인 듯한 권사님과, 아프리카에서 우리나라로 신학공부를 하러 와 있는 흑인선교사가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K목사님은 흑인선교사와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영어회화가 유창하셨습니다. 흑인선교사는 E교회에서 모든 학비와 체재비 일체를 지원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십 여분이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친구인 듯한 권사님과 대화를 나누시는데, 교회 신축에 관한 얘기인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잠시 쳐다보시더니, “여기 있는 박 전도사 아버지가 박○남이야, 우리 아버님이 철원에서 얼마동안 목회하셨잖아. 그 때 ○남이라고 있었어. 이 친구가 바로 ○남이 아들이야!”
K목사님은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15년 이상 연하셨는데, 우리 아버지 이름을 무슨 동네 친구 이름 부르듯이 부르며 하대(下待)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 때 여선교회 회원인 듯한 여자 교인들이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갖고 오셨는데, K목사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이셨습니다. 그러나 저 말고는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시금치국에 밥을 말아 억지로 밥을 삼켰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K목사님은 “이번 주 토요일부터 와!” 그러면서 무슨 회의가 있다고 다른 데로 가시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횡 하니 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꼭 그 꼴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멀뚱하게 서 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내가 다녀야 하는가?’ ‘내 학비를 벌기 위해 자존심이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다녀야 하는가?’
일주일 내내 머리가 지끈거리게 아플 정도로 고민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잠시 묵상을 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E교회 분위기에 쉽게 적응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32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E교회는 그 후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해서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씁쓸한 생각이 32년이 지났는데 그때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옹졸한 탓이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32년 전 E교회를 안 간 것이 잘 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의 판단은 32년이 지났지만 유보(留保)입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젊음이 있었고, 패기가 있었습니다. ‘예\\'와 \\'아니오’를 가장 분명하게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나의 삶의 든든한 밑천 구실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좀 더 너그러워지고 곰삭아질 필요가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