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중부연회 고 모 목사의 감독자격론에 대하여,
장병선
- 2847
- 2012-09-03 09:00:00
잘 모르니까(학력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고목사 부자의 행태로 미루어 이런 이가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이곳 산유리 교회가 지난 해로 환갑을 맞이하였고 올해로 61주년을 8월 둘째주에 보냈다.
작고 역사도 짧은 농촌교회이지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교회이다.
김홍도목사가 전도사로 호명산 너머 상천교회 전도사 시무시절에 산유리교회도 맡아서 목회하였다
한다. 김국도목사는 신학생 시절에 주일학교 지원을 나왔다고 한다.
목원대 은퇴 교수인 정00목사도, 전도사 시절에 이 교회에서 목회했다(영어를 마구써서 교인들이
말귀를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한다. 시골교회를 하버드 대학으로 착각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현재 중부연회 감독이 되고자 하는 고 목사의 부친이자 원로 목사요, 세습목사인
고용봉목사가 첫 목회를 한 첫 임지이다. 그 때 개척이 되었다.
6.25이후, 황폐한 농촌 현실과 주민이나 교인들이나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가 하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시 고용봉전도사는 교회 옆집을 남과 함께, 방은 각 각 쓰되 부억은 함께 쓰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 때 고신일 목사를 낳았다고 한다. 고목사에게는 산유리가 고향인 셈이다.
그 때 고생 많이 했다 한다. 교인들이 고생하는 목사님 볼 수 없어,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서 지게로 지어다 드리고, 쌀이 떨어지면 한 말씩 갖다 드리며 연명했다 한다.
나는 신학교 4학년 때, 처음 목회자로 나선 이후 현재까지, 14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어떤 교회는 일년, 어떤 교회는 3년, 8년, 제각기 시무한 햇수는 다르지만 그 모든 교회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특히 전도사 시설의 첫 목회지였던 논산 구로 교회, 군목 첫 목회지였던 27사 78연대 교회는
특별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곳이 그리워 살짝 가서 보고 오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고용봉 원로목사의 초임지라기에, 2년여전 산유리 교회 부임하자 마자,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전화받는 태도는 아주 쌀쌀했으며, 귀찮다는 듯이, \\'나중에 내가 전화 하겠다\\'하며 끊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요구하고자 해서 연락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해에 있을 60주년 행사에 대하여 첫 목회자이니 만큼 의논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내게 어떤 전화도 오지 않았고, 나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60주년행사에 그의 이름도 없었다.
노인들만 몇이 모이는 교회,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믿는다.
도시 교회의 수천명 신자들의 영혼의 무게나, 농촌교회 20여명의 노인들의 영혼의 무게나 무게는
똑 같다고,
고신일 목사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고향교회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용봉목사 당시, 나무를 해다 드리고, 쌀을 가족 몰래 퍼다 드렀으나 지금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한 노인이
열을 내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내가 왜 교회 안 다니는지 아세요? 자기가 시골교회에서 목회할 때 고생했으면, 도시로 나가 큰 교회 이루고, 성공했으면 농촌교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들여다 보지도 않잖아요!
고급 자가용을 굴리고, 비서를 두고, 으리 으리한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던데요?. 교회를 왜 자식에게 물려 줘요, 개인 재산입니까?\" 나 보다 고씨네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이 기성교회목회자들의 행태에 실망하여 교회 나오지 않는 냉담자들이 이 작은 마을에는 한 둘이 아니다.
그토록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다는 그 분에게 나는 지금도 교회 나오시라는 말씀을 못 드리고 있다.
시골 사람들이라 생각도 없는 줄로 우습게 여기지 말라. 그들 또한 볼 것은 다 보고 알 것은 다 안다.
성공 지상주의, 세습, 과거의 은혜를 잊는 자, ..,. 이런 자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모쪼록 중부연회에서 바른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