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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듣기 싫어도 복이 되는 일이라면?
- 1812
- 2012-09-02 09:00:00
♣2012년 9월 2일 성령강림 후 열네 번째
성경 ; 잠1:20-33, 막8:27-38, 약3:1-12
제목 ; 듣기 싫어도 복이 되는 일이라면?
물맷돌자료실 : http://cafe.daum.net/moolmatdol
요즘, 저는 카톡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게 ‘아침편지’를 열심히 보
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카톡을 하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어서, 저
는 하루를 아주 활기차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227명
에게 카톡을 통하여 아침편지를 보내고 있고, 스마트폰이 없는 마흔
아홉 분에게는 멀티문자를 이용해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카톡은 ‘카카오톡’의 줄임말입니다. 그리고 ‘카카오톡’이란, ‘카카
오’라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문자서비스 프로그램을 말합니다.
‘톡(talk)’은, 알다시피 ‘말하다, 이야기하다’의 영어표기입니다. 그러
니까, 카카오톡은 ‘카카오’라고 하는 회사에서 만든 ‘인터넷 대화 프
로그램’인 것입니다.
저에게서 아침편지를 받아보시는 분들은, 그분들이 원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아침편지
를 받아보는 분들 중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받아보시는 분
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신 분들도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여겨집
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고맙다, 은혜를 받고 있다.’는 답신을 보
내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전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딱 한 분, ‘문자를 다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사절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번에 카톡을 통한 아침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이후
로, 문명의 이기(利器)를 잘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
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워낙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목사와 교인 사이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카톡을 통하여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수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어떤 분들은 제가 보내드리는 아침편지를 받
아보고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아
침편지가 기다려진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짐작으로는 2/3
정도는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아침편지를 통하여 적지 않은 유익과 기쁨을 얻고 있는가 하
면, 어떤 분들에게는 ‘아침편지’가 별로 소용이 없는, 어쩌면 ‘아주
귀찮고 성가신 문건’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아침편지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저에게 사절의 문자를
보내주면 됩니다. 그리고 카톡 프로그램 안에는 수신거부나 차단이
라는 장치가 있는 고로, 얼마든지 아침편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그야말로 순
수한 마음으로 보내주고 있는 ‘아침편지’를, 수신자가 고맙게 받아들
인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인 잠언 1장을 보면, 지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
다.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직은 제대로 잘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여, 언제쯤 어른스럽게 살아갈 것이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빈정대
기만 하는 사람들이여, 세상일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비난만 한다고
해서, 당신의 처지가 더 나아질 것 같소? 남의 말은 죽어도 들으려
고 하지 않는, 이 미련한 사람들이여, 온갖 풍상 다 겪어서, 이제는
세상일에 대해서 뭔가 좀 깨달은 바가 있는 내 말을, 왜 그토록 지
겨워하면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요?’
이렇게 말한 다음, 지혜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물론, 내 말이
듣기 싫은 잔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거요!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은 찾아와서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내 말은, 이제 새롭게 마음을 고쳐
먹으려고 애써 보라는 거요. 그러나 내가 그토록 손짓을 하면서 내
말을 들어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니, 어쩌면 좋겠는가?’하고 한탄하
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결국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
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일러주어도 내가 하는 말
을 우습게 여기고, 그런 짓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무리 꾸짖어도
콧방귀도 뀌지 않으니, 너희가 언젠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비웃으며 조롱할 날이 올 것
이다.’라고.
지혜자는 계속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에 대해서 말
하고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들이, 미-친바람 불어
대듯, 사방에서 밀려올 것이다. 살다보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질풍같
이 밀어닥칠 것이다. 그때에, 너희의 한숨 소리가 얼마나 크겠느냐!
너희 눈에서는, 슬픈 눈물이 닭똥같이 뚝뚝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나를 찾아와서 어찌하면 좋겠느
냐고, 어떻게 좀 도와 달라고 문을 두드리며 애원하겠지만, 나는 대
답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자가 이처럼 무서운 말로 경고하는 것은, 결국 지혜자가 하는
말을 한 번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자가 일러주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혜자는 결론지어 말하기를 ‘내
충고를 따르지 않으면서 내 훈계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
람이다(1:30)’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혜자는 다시 한 번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자기가 꾸민 일에
자기가 당하리라(1:31)’고 말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은 자기 고
집과 주장에 따라 제멋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고, 어리석은 자들은
‘뭐 무슨 일이야 일어나려고?’하면서 아무런 걱정조차 하지 않다가
‘설마, 설마’하는 사이에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
이, 지혜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내 생
각과 내 고집을 버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
을 것이다(막8:35)”라고 하셨습니다. 요컨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대로 살아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째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인간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세상
적인 욕심이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시는 길에 제
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
자, 제자들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을 세례요한이라고 합
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시오?”하고 물으셨
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
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오.
당신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
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알려주신 것이오(마16:17)”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극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된 사람’이
라고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
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주님께로부터 가장 극심한 책망을 받
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가 “선
생님이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말 주님을 걱정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은 이미 그 마음을 꿰뚫어 알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돌아가시면
자기 앞날이 불투명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죽으
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왕위에 올
라야만, 자신이 국무총리라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게 되
면 그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어째서 당신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거요!”하고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성령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
라고 극찬하셨는데, 이제는 “사탄 마귀”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학장을 지낸 ‘모건’ 박사의 이야기입니
다.
모건 박사가 결혼하자마자, 그의 아버지께서 아들네 집을 찾아오
셨습니다. 그리고는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셨습니다. 모건 박사 내
외는 방이며 거실이며 주방을 다 보여드렸습니다. 이곳저곳을 둘러
보신 아버지께서 말씀시기를 “집이 크고 좋구나. 하지만, 이곳저곳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네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사탄에게 속한 사
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하고 지적하셨습니다.
모건 박사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서는 다시 한 번 집안 이곳저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 모건 박사 내외는, 아버지의 말씀을 교훈삼아서, 방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을 걸거나 장식을 했다
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건 박사의 부친께서는, 그의 아들 모건이 사는 집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사탄에게 속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했습니
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과연 하나님께 속한 사
람인지, 아니면 사탄에게 속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
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행심사(言行心事)가 ‘주님의 사람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헷갈리게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말의 내용이 우선 긍정적이어야 합
니다. ‘안 된다. 못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다’
고 우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문제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으로 교회나 주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해야, 마음으로나 육신적으로 고달픈 일이 생
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다음, “누구
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려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막8:34)”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무
엇인지’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버리는
일도 힘들거니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기를 버린 다음에 주님의 뒤를 따르
고자 힘써야 하는 것은, 그 길이 바로, 잠언서의 지혜자가 말하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멸망하게
된다고, 지혜자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좀 더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다가, 그리고 내 가족을 좀
더 챙기려고 하다가, 그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옳지 않은
길을 가게 될 경우, 그것은 곧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되는 것임을, 우
리는 항상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과 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우상에게도 예배하거나 섬기지 마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
하는 하나님이다. 나에게 죄를 짓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삼,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나
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걸쳐서 한결같은 사랑
을 베풀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3~4대까지 벌
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에는 수천 대에 이르도록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자 하면 우리 후손
3~4대까지 벌을 받게 되는 것이고, 내가 죽으면 우리의 후손 수천
대에 이르도록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내가 재미나고 즐겁게 살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어김으로써
우리 후손 3~4대까지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고
생스럽더라도 우리의 후손 수천대가 복을 받는 십자가의 길을 가겠
습니까? 물론,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십자가의 길이란, 내 고집
과 내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목숨)를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막8:3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
리는 힘들어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나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자가 말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
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고
미련한 길, 곧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베드로는 말 한 마디 잘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 한 마디 잘못함으로써, 베드
로는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 이면(裏面)에
는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그를 지배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갈팡질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
리도, 그 당시의 베드로와 비교해볼 때,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십자가를 거꾸로 지기까지 주님께 충성할 수 있
었던 것은, 그가 인간적인 생각, 곧 이기적인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야고보 선생도 말하기를 ‘어떤 때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찬양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저주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3:8)’라
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복
이 되고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길을 부지런히 가야 할 것입니다.
차동엽 신부가 쓴 ‘뿌리 깊은 희망’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막스 플랑크 교육 연구소’가 15년 동안 1천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대부분 역경이나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본 사람
들이 순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웠다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 세상의 헛된 욕심, 또는 세상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
다가 겪게 된 고난이 아닙니다. 아니면,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
하다가 겪게 되는 환난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다 보니, 겪게 되는 시련과 고난
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지혜자가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
써, 어리석고 미련한 길이 아니라, 참으로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시
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
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