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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는 제왕적이어야 하는가? (머무름을 경계하며)
이재신
- 2080
- 2014-09-25 03:06:07
구약에서 농경신과 유목신의 차이를 누구나 안다.
머물러 있는 가나안의 농경신 바알에 비해서 이스라엘의 야웨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언제나 앞서 운행하신다.
머물러 있으면 물이라도 썩게 마련이다.
배 안에서는 물이 오래 있어도 썩지 않는다.
이유는 배가 파도에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죽고 서서 움직이면 산다.
이런 원리로 오늘의 교회에 접근해 보자.
교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농경신의 지배(이동하지 않고 머물러서 변화를 거부하고 계절 따라 열매를 취하는 자세)아래 요지부동의 천박한 공간으로 남게 되었는가?
그것은 중세의 시작과 더불어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관료화, 제도화, 구조화되어 이제 생존의 투쟁보다 지배의 탐욕과 유지의 태만함이 교회 안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병이 들듯 교회도 그렇게 병이 들고야 만 것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교회의 지도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려던 열정은 사라지고 세속의 그것처럼 권력화되고 세속화되어 섬김 대신 지배하려는 유혹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역사는 뭉쳐 있을 때보다 강제로라도 흩어져 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을 본다.
구약의 집필이 유배생활에서였고, 신약성경 역시 지독한 핍박의 상황에서 나왔던 것을 주지한다.
심지어 바울은 옥중에서까지도 성경을 기록해서 이 후의 모든 역사적 교회의 기초를 공고히 하지 않았는가?
역사에서 보듯 치열한 핍박의 상황에서 생존의 몸부림 즉 존재와 맞닥뜨린 강력한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병든 교회는 치유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제일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자체 내의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부흥케 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한 세상으로부터 다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고, 외면한 그들의 시선을 다시 모으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어야 한다.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그 답은 성경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바로 무에서의 유를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다.
해서 구원의 방주요, 천국의 모델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콘크리트로 지붕을 만들어 뒤집어 씌워 놓은 옹졸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 중에서도 신약, 그 중에서도 바울의 서신 중에 교회 생존의 답이 있다고 본다.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모든 목회자들의 거울이다.
바울은 오늘의 담임 목사 개념으로 목회 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야말로 바울은 세계가 선교 무대였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던 계획을 하루아침에 바꿔서 마케도냐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슨 목회의 장기계획을 잘 세워야 하고 마치 계획성없는 것은 큰 잘못이며 잘 세운 계획만이 최선인 것처럼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직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과 자기의 성공을 위한 계획과는 다르다는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자식까지 붙들어서 머물게 하려는 오늘의 일부 목회자들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대목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가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의 불모지라도 먼 미래를 보고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구걸?을 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그곳에 복음의 씨를 부렸고, 매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혀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오직 복음전파의 일념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아다시피 이런 것들은 무슨 연구를 통해서나 깊은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너무 많은 세미나나 연구 모임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쉬운 답을 너무 어렵게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냥 성경을 통한 바울을 생각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의 발자취일 뿐이다.
구글은 달 탐사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아마도 바울이 있었다면 우주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는 그 이름도 고결?한 <담임목사> 제도를 갖고 있다.
이 말 속에는 말 그대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개념보다 한 교회와 그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사람 즉 <주인>이란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진다.
자연히 이 담임목사라는 말 속에는 선교(외부)지향의 교회라기보다 내부지향의 성장을 통해서 부와 숫자와 자기명성을 만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참에 제안한다.
담임목사란 말 보다 그냥 복음전도자(에반젤리스트)란 말로 목사의 모든 호칭을 바꿨으면 한다. (물론 호칭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겠지만)
직급이나 호칭을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 바로 서열화요, 계급화가 아닌가?
참고로 공무원도 차츰 호봉제를 없앤다고 하던가?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외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맞는 말이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반대할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맞는다면 다른 모든 이유와 핑계들을 뒤로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 시대는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목사들로 인한 폐해가 너무 크다.
그 유명한 순복음의 조 아무개나 명성의 김 아무개나 감리회의 세습 목사로 잘 알려진 삼형제들이나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교회의 물을 이렇게까지 흐리게 하고도 일말의 책임의식이 없이 사는 그들을 보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곳이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곳이라는 안일한 생각이라면 더더욱 어렵다.
자기를 희생해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정점에 있다면, 오늘의 소위 성공?한 목사들은 예수와 얼마나 닳아 있다고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예수 닮기 운동보다 오매불망 목회의 성공만을 꿈꾸는 자들은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리라.
세속에 영합하여 현실의 열매를 자기들만 교묘하게 독차지하는 비열한 기득권자들이라고 비판한들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듯 자력으로 내려놓지 못하니 세상이 외면하여 타력으로 내려놓게 하는 일이 지금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정신을 차리고 지켜봐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