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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구원론의 딜레마 극복을 위한 小考..
김성국
- 1968
- 2014-10-05 02:58:57
교계뉴스가 한국사회에 뜨거운 핫이슈로 자리잡은지도..
오래 되기도하고.. 이 부분에 대해 기독자들이 좀더 고민하고자..
지난번에 올린 글을 좀 더 풀어.. 깊이 생각하고자 싣습니다..
(이것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특히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니..
평신도분들께서는 이해하시고.. 보셨으면 합니다..
목회자들이 하도 문제가 많아서.. 올린글이니 용서하고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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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원론의 딜레마 극복을 위한 小考..
칼빈은 전적인 하나님 단독의 절대적 구원주권인 예정론을 주장했고, 웨슬리는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조건으로부터 제한당하거나 거부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칼빈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불가능한,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예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제한된 구속이론을 주장하는 반면에, 웨슬리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보편 구속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정당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이 엄청난 양립할 수 없고 서로 배척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 딜레마의 가르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뿐 아니다. 여기에서 발전한 둘 사이의 운명적 충돌을 초래하는 이론들이 또 제시되고 있는바, 칼빈은 한 번 받은 구원은 그 어떤 경로로도 절대 취소될 수 없고 폐기될 수 없다는 구속이론을 갖고 있으며, 반면에 웨슬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조건에 따라 구원을 잃을 수 있으며, 영구히 성령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구속이론을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이 세기적인 교리적 충돌은 오늘날도 여전히 뜨거운 화두로 교계에서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거론되는 예민한 주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과제를 결코 풀 수 없는, 영구미제의 난제로만 미루어 놓을 것인가? 이 둘 사이엔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신학적인 교두보 마련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질문을 역설적으로 한번 던져보자. 왜 칼빈은 제한된 구속이론과 무조건적 예정론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이 질의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과 광휘를 위하여 드리는 신학적인 고백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즉, 인간의 모든 구원의 결정과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도권에 의한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 이후 역시도 여전히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문제이기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신학적인 전제를 깔고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칼빈의 구속이론은 결정론적이며, 운명론적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이론에 근거한다.(철저한 비관론) 이를테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그 어떤 선한 의로운 행위도 가질 수 없다는 이론이다.(이 칼빈의 구속이론은 바울의 신학이론에서 찾아졌고,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거쳐 성립된 이론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웨슬리는 인간구원의 여부를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자체에 초점을 두어 이론을 전개해 가고 있는가? 웨슬리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전제인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적 조건이 모든 인간 앞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의 행동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이 이론은 하나님이 부패한 인간에게 주신 선행하시는 은총으로서, 인간이 의지적으로 구원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셨다는 이론이다 - 은총적 낙관론) 즉, 십자가의 구속적 행위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적 선물은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어지는 응답의 행위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은총적 선물행위를 받을 것이냐 안 받을 것이냐는 응답의 행위는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달려있기에 하나님이 그 행위자체에 결코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논리에 기반한다.(물론 존 웨슬리의 구원관 이해를 위해서는 좀 더 심화된 학습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웨슬리의 구속이론은 과정론적이며, 목적론적이라 할 것이다.
웨슬리는 이 모순된 구속이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의를 던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은총)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체란 과연 어떤 것이여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인식할 때에 하나님의 구속이론을 정확하게 정립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은혜\\'란 \\'값없는 것\\'을 말한다. 즉, 어느 누군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가 아무 조건 없이 긍휼함만 가지고 용서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다. 또한 \\'영광\\'이라는 본질은 \\'자존감\\'과 \\'명성(이름을 떨침)\\'으로 압축 표현될 수 있기에 그러한 상태가 되려면, 그를 따르는 추종자나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존귀함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부모가 영광을 얻으려면 자식들이 사회적으로 존귀함을 입어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 할 것이다.
웨슬리는 바로 이 단순한 논리에 기반하여 구속이론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바, 바울이 표현하고 어거스틴이 강조하려는 주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성품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은총과 영광\"에도 충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가진 죄악된 숙명을 해결키 위해 십자가가 주어졌고(사랑), 십자가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공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셔서 구원을 베풀어 만인이 구원을 얻게 되니(은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존감이 드높아져 하나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표출하게 되는 것(영광)이 웨슬리의 구원이해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선택이론과 어거스틴의 예정이론은 결코 칼빈의 논리를 뒷받침하지 않고, 오히려 웨슬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케 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칼빈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과 은혜\"를 강조하고자, 이중적 예정이론(제한된 구속이론)과 견인적 구속이론(영원히 잃지 않는 구원이론)을 전개해 나간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이중적 예정은 선택자와 유기자를 동시적으로 전제하는 것이기에, 이유 없이 유기된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불공정성에 불만할 것이며(하나님의 \\'사랑\\'의 실추), 어떤 경우라도 잃을 수 없다는 구원론을 가진 패륜자의 죄악성 때문에 드높아진 원성으로 인하여(하나님의 \\'공의\\'의 추락), 하나님의 \\'은혜\\'의 실현은커녕, 하나님의 \\'영광과 광휘\\'의 성취마저 상실케 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과연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는 물론이고, 이론적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의 극치라고 웨슬리는 칼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속죄이론이 예기치 않은 모순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칼빈은 어째서 웨슬리와는 정반대의 속죄이론을 결과했던 것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로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학이론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칼빈의 비관주의적 인간관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칼빈 당시의 로마카톨릭의 신앙세계를 체득하면서 얻게 된 신앙적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새롭게 등장한 인문주의적 이성과 결합한 신앙적 체계(스콜라주의)가 얼마나 허황되며, 또한 인간군상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상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극악한 행위들뿐인가 절망하면서 경험하고 체득한 인간적 비관주의가 칼빈의 신학적 체계의 근간을 만들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오직 하나님신앙만을 부르짖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구원과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들을 감안한다면, 칼빈이 본래 의도하고자 했고 말하고자 했던 사실은, 웨슬리와도 다를 것이 없는바,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광휘가 어떻게 잃어지지 않고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의 방식과 과정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웨슬리는 자신의 구원론적 경험을 토대로 실존적인 좌절도 있었으나, 점차로 그리스도인의 균형적인 실체(본질성)를 알아감에 따라서 진정성있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인식한 책임적인 인간의 응답의 행위에서 찾았고, 칼빈은 그것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체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스스로 찾아지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땅의 모든 역사와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기능할 수 있다는 관점을 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웨슬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인간의 행위와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은 비로소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다는 관점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결국엔 이 신앙관의 차이가 이렇게나 서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만들어 낸 셈이 되었다. 진정 이 둘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이곳에서부터 출발되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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