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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5가지 조건, 좀 의미가 없어 올려봅니다
관리자
- 1305
- 2014-10-04 19:58:36
의미가 좀 있어 보이지만 의미가 좀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언 폐지하고
1.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늘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이기에 굳이 깊은 묵상이 필요 없는 것이며 성령의 감동은 직관적인 깨달음이니 깊은 묵상은 불필요함이라 할 것입니다.
2. 폭 넓은 독서라 한다면 어떤 독서를 말함일까요? 소설? 수필? 아니면 시? 그도 아니면 역사? 철학? 미래에 대한 예견서? 또 그도 아니면 만화? ㅎㅎ 세상의 지식과 책은 너무도 방대합니다. 그 책을 다 섭렵한다는 것은 이젠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선택적인 독서 방법이 필요한 때입니다. 만약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독서란 전체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편협적인 독서라 할 것입니다. 폭 넓은 독서란 너무도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결국 사람의 방법이며 사람의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에게 폭 넓은 독서란 불가근 불가원 입니다. 곧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독서를 많이 해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을까요?
3. 영적 체험을 통한 영성의 강화라 하였는데... 영적 체험은 또 어찌 하는 것입니까? 영적 체험을 하고 싶다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제가 알기론 영적인 체험은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얻게 되는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곧 물과 성령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하고 싶으면 하지 않을 수 있고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것처럼 표현을 하였으니 이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영성이라고 표현한다고 모든 말이 성경적이진 않습니다.
4. 논리적 사고에 대한 훈련이라면 이것 자체가 이미 인본주의적입니다. 성령께서 논리적인 사고의 훈련을 시키실까요? 논리적 사고는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이며 주님의 말씀이 합리적이며 성령의 감동만이 인과를 바르게 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함이 옳다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또한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훈련이란 세상의 것에 대한 유익을 말함입니다. 이 자체가 철학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시니 당연 그리 말씀하실 것입니다. 철학이 좋은 설교자를 만든다면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설교자였던가요?
하나님의 감동이 설교가 되고 때론 철학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그냥 철학일뿐 입니다.
5. 교인들의 수준에 대한 배려라 하셨는데 이 또한 참으로 애매모호함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교회엔 일정의 수준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교회엔 일정한 수준이란 없습니다. 다 모여 있음입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그 자체가 이미 설교 였습니다. 그 설교는 철학적인 사고가 있고 학식이 높은 지식인들을 상대로 함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학적 지적으론 낮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너무도 고상한 말씀처럼 보여지고 대단한 경지에 오른 이들의 선문답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웨슬리의 설교도 읽어 보면 \\'와! 이 설교가 진정 일반 대중들을 위한 설교였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거리 설교자였으니 그의 설교는 극히 평범한 그 시대의 대중들을 향한 설교였다 할 것입니다.
사실 웨슬리의 설교가 어려워 진 것이 아니라 웨슬리의 설교를 해석한 이들이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도 해석자들이 어렵게 만든것이라 할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이해도가 다르니 너무도 어려운 영적 지식의 전달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 모든 차이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은 해석자나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의 수준에 맞추어 적합한 배려를 하시며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설교를 한다면 성령은 또 다시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수준에 맞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의 마스터는 필요한 조건이라 하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한다면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영어를 해야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정서 깊숙히 자리 잡은 사대주의 때문에 영어를 하는 것을 숭상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그와 같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만찬가지입니다.
언어는 사대가 아니며 숭상하거나 높이 평가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생활과 삶의 필요입니다.
설교자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필요하긴 하겠으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설교자가 필요 없음이라 한다면 불필요가 될 것이지 반드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라어와 헬라어를 강조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벗어난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겐 사족일뿐입니다.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인 것은 맞지만 또 오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오해란 바로 뒤에 따라오는 설명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함입니다.
정관계 비리가 있음은 진정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일까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일까요?
금권선거에 대하여 바르게 가르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일까요?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어도 욕심에 이끌리며 비리를 저지르고 금권선거를 할 수 밖에 없음이 될 것입니다.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배우지 않았다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작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르치고 배움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함입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욕심에 빠지면 작은 도둑이 되겠지만 많이 배운 사람이 욕심에 바지면 큰 도둑이 됩니다. 차라리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못한 것보다 못함이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타락하여 말씀의 종교라 하면서 설교자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들의 타락이 기독교의 타락이 아니지만 기독교가 설교자의 종교로 타락함으로 설교자의 타락이 기독교의 타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에 이단과 사이비가 많음이 바로 설교자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설교자에 의해 그 정체성이 변질되어 이단과 사이비가 많아짐 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교회-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말씀이 되며 진리의 말씀이 되며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말씀의 모임(교회-종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임(교회-종교)이며, 진리의 말씀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자들의 모임(교회-종교)이며, 생명의 말씀으로 거듭난 참 생명을 회복한 자들의 모임(교회-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리이며, 말씀이며, 생명이며 삶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모임(교회-종교)이지만 설교자의 말씀(설교)의 종교는 아닙니다.
설교자의 5가지 조건의 글을 자세히 살펴 보면 글 전체에서 기독교적인 단어를 빼고 본다면
이미 그것은 세속 종교의 가르침의 기준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한번 이렇게 바꿔 볼까요?
불교의 훌륭한 설법자가 되기 위한 5가지 조건..
첫째는 불경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이다.
둘째는 폭 넓은 독서를 통한 넓은 식견이다.
셋째는 영적 체험을 통한 영성의 강화이다.
넷째는 논리적 사고에 대한 훈련이다.
다섯째는 교인들의 수준에 적합한 배려이다. 말하자면 눈높이 설법을 하는 맞춤설법의 배려이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제 이야기가 너무 억지적인 주장처럼 보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