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2> 논란 중인 롬 7:14-25 중 16-25의 주석
관리자
- 1954
- 2014-10-12 01:46:46
실제로는 율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율법이 [선한](칼로스, καλός) 것, 즉 훌륭하고도 멋지고 매력적이며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동의하는 것이 육신의 참 모습(분열 상태)이다.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지 못하거나 행치 않고자 하는 바를 행하게 되는 까닭이 율법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와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율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 속에서 활동하는 죄의 탓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17】[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행하는](카테르가조마이, κατεργάζομαι)은 15절의 의 주석을 보라.
육신으로서의 인간의 내적 분열 및 투쟁 그리고 패배로서의 범죄 행위 등 이 모든 것의 근본 요인은 인간 속에 거하는(오이쿠사, οἰκούσα) 곧 상주하는 죄이다. 이 죄가 자기의 노예가 된 육신을 통해(14절) 행사하는 것이다.
그는 더욱 구체적으로,【18】이는(원문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①라고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은 한 존재의 낮은 자아를, [원함은 내게 있으나]는 높은 자아를 의미한다. 이 구분은 몸 또는 정신의 어떤 부분은 전자, 어떤 부분은 후자로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자아)의 상반된 이중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자에는 [선한 것](아가톤, ἀγαθόν: 2:7의 주석을 보라.)이 없고, 후자에는 선의가 있다. 전자에는 죄의 지배가 있고, 후자에는 양심 또는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 그러나 양심 또는 율법을 따라 [선](칼론, καλον)을 성취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재한 죄의 힘 때문에 어디까지나 소원에 그칠 뿐이고, 실제로는 죄의 종으로서 원치도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여기에 양심적 인간 및 도덕적 인간의 비애가 있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19】그렇기 때문에(원문에는 19절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하는 것이다.
[선]은 아가톤(ἀγαθόν)이고, [하지]는 포이오(ποιώ)이고, [행하는도다]는 프라스소(πράσσω)이다.
이 구절은 사실상 15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그는【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17절의 반복이다.
지금까지(7:14-20) 율법에 비춰 본 자아의 무력성을 논한 바울은 이제 그 파국, 즉 항상 악의 승리로 끝나는 자아 속에서의 선악의 싸움을 논하고 있다.
그는 앞의 내용(7:14-20)을 받아,【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한 법을 깨달았노니]의 [깨달았노니]는 유리스코(εὑρίσκω)로서 ‘얻다’(히 9:12), ‘확인하다’, ‘계산 또는 시험 및 진찰에 의해 찾다’(행 13:28), ‘발견하다’(눅 2:45), ‘고안하다’, ‘생각해 내다’, ‘간파하다’, ‘깨닫다’(눅 19:48, 본절) 등을 뜻한다. 이 말은 원문 초두에 있어 매우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괴로운 투쟁을 통해 한 법을 깨달았는데, 전에는 그 법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J. A. Bengel).
[한 법](톤 노몬, τὸν νόμον)에 대해 (1) 하나님의 법 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설,② (2) 죄의 법 또는 육적이며 부패한 본성 곧 악한 성향과 기질이라는 설,③ (3) 생활에서 얻는 경험의 원리 또는 생에 내적으로 작용하는 원칙이라는 설,④ 등이 있다.
이 구절 초두의 [그러므로](ἄρα)가 앞(7:14-20)의 내용, 즉 죄의 지배로 인해 육신이 선을 원하나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상반된 이중성을 받은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어서 그 이중성과 직접 관련되는 선과 악, 속사람과 지체,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마음의 법과 다른 법을 대조하여 논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발견한 것은 [선(칼론, καλόν)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원리이다.
그 원리에 대해, 바울은【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문 22절의 첫 부분에는 가르, γὰρ가 있어 21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구절에는 속사람과 지체,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객체이며 원천) ‘마음의 법과 다른 법’(주체이며 활동 장소) 등의 대조, 그리고 상호간의 반목과 투쟁이 나타나 있다. 전자들(속사람, 하나님의 법, 마음의 법)은 전자들끼리, 후자들(지체, 죄의 법, 다른 법)은 후자들끼리 상통한다.
[내 속사람]의 [속사람](ἔσω ἄνθρωπον)은 이 곳 외에 고린도후서 4:16과 에베소서 3:16에만 나타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과 동의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구별되는 말이다. 새사람은 육체, 육적인 본능, 욕구 그리고 행위 등을 의미하는 겉사람(고후 4:16)과 반대되는 것으로, 영혼(ψυχή)과 인격의 주체이며 이성적, 도덕적 자아이다. 속사람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22절), 또한 하나님 및 영원한 것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거기에 거처하고 싶어하시는 성령을 모셔들임으로써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야 하며, 또한 내재하신 성령을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것들을 공급받아야만 한다}(엡 3:16의 주석). 여기서는 “마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黑崎幸吉).
[내 지체 속에서]의 [지체](멜레신, μέλεσίν: 6:13의 주석을 보라.)는 여기서는 육체, 육적인 본능, 욕구 그리고 행위 등을 뜻하는 겉사람(고후 4:16)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법이 활동하는 장소이다”(黑崎幸吉).
[한 다른 법](헤테론 노몬, ἕτερον νόμον)의 문자적인 의미는 ‘질적으로 전혀 상이한 법’(갈 1:6)이라는 점과 이 법이 지체들 속에서 활개친다고 한 점을 미루어 보아, 지체 속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죄의 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내 마음의 법]의 [마음(νοός: 1:28의 주석을 보라.)의 법]에 대해 黑崎幸吉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의 법칙과 같은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육신으로서의 인간의 두 상반된 법은 서로 극렬한 싸움을 하는데, 항상 지체 속의 다른 법인 죄의 법이 인간을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원문에는 ‘안으로’ 곧 엔, ἐν으로 되어 있다.) 사로잡아] 온다. 그리하여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러한 자신을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보기만 하는 것보다 더 큰 비통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곤고한]은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로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Schlatter).⑤ “이 낱말은 비참한 것을 의미하며, 모든 면에서 불행에 의해 타격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Bauer).⑥
[오호라 나는 ‘곤고한’(탈라이포로스, ταλαίπωρος: 3:16의 “고생”의 주석을 보라.) 사람이로다]는 “절망의 심연에서 나오는, 심장이 찢기는 울부짖음이다”(W. Sanday & A. C. Headlam). “이 탄식은 15절부터 계속해 온 고충과 괴로움의 절정인 동시에 결과요 또 결론적 고백이다”(김선운).
[사망의 몸]의 [몸](소마토스, σώματος: 1:24의 주석을 보라.)은 여기서는 단순한 육체(Chrysostom)⑦가 아니라, 죄의 몸(6:6) 곧 죄의 지배를 받아 범죄하는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다.⑧ 따라서, 죄의 종으로서 범죄하는 자아는 죄의 값이 사망이므로(6:23) [사망의 몸] 곧 “사망의 지배를 받는 몸”(W. M. Greathouse)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을 운명에 처한 자아이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장차 반드시 있을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 “내심의 분리와 투쟁 때문에 겪고 있는 죽음의 고통을 가리키는 것이다”(黑崎幸吉). 특히, 지시 대명사인 이(투투, τούτου)는 단순히 사망(θανάτου)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⑨“5:12 이하에서처럼 죄가 지배하는 곳에서 죽음의 세력이 세상과 전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우리의 육신적 삶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E. Ksemann).
그러한 육신으로서의 인간, 특히 종교적 경건을 추구하는 인간이 “응당 하고야 말 최후의 소리”(黑崎幸吉)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다.
[건져내랴](ῥύσεται)는 “적군의 포로가 된 전우를 달려가 구출하는 병사의 행동을 표시하였다”(Godet).⑩ 여기서는 미래형으로 되어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이트하우스(W. M. Greathouse)는 “육신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된 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에 적용되며, 이는 참으로 육신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케제만(E. Ksemann)도 “여기서 구원은 오직 이 육신으로부터의 구출에서만 볼 수 있으며, 병행문에서처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그러므로 14-20절의 의지와 행위의 대립은 우선 도덕적 지평에서의 이율배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완전히 분명해진다. 계속적으로 실패하는 의지는 궁극적으로 그것의 구체적인 활동에서조차 생명과 구원을 얻으려는 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죄인이 아니라 경건한 인간이 그것의 운명을 대표한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위에 대한 대답이요(“H. A. W. Meyer”,⑪ “Hodge, Murray”⑫) 찬미(J. A. Bengel)로, 바울은【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⑬는, 율법이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요 3:16, 고전 15:57)을 깨달은 바울의 감사의 고백이다.
[그런즉]은 아라 운(ἄρα οὖν)으로서 ‘요약하자면’,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러면’, ‘그렇다면’ 등을 뜻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또다시 마음과 육신,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대조하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K. Aland, et al., ed.: ‘없노라’(οὔ)는 א, A, B, C, 81, 436, 1739, 1881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D, G, K, P, Ψ, 33, 88*, 104, 181, 326 사본 등에는 ‘발견하지 못하노라’(οὐχ εὑρίσκω)로 되어 있다.
2) “Erasmus, H. A. W. Meyer, Hornbergius, Origen, Chrysostom, Knapp, Tholuck, Olshausen, Shedd”(in 김선운), J. A. Bengel, R. C. H. Lenski, 이상근.
3) J. Calvin, H. Alford, J. Wesley, A. Clarke, “Gifford, Godet, Lightfoot, Grotius, De Wette, Hodge, Murray, Venema, Limborch, Michaelis, Bolten, Ammon, Stuart, Estius, Wolf, Boehme, Flat, Jatho”(in 김선운), A. Barnes, W. M. Kroll, A. B. Mickelsen, 김선운.
4) E. Ksemann, E. F. Harrison, J. Knox, 黑崎幸吉, 조선출, 전경연, NEB, JB, 공동번역 성서.
5) in E. Ksemann.
6) 상동.
7) in 이상근.
8) M. Luther, p. 65. H. Alford, J. A. Bengel, E. Ksewmann, 黑崎幸吉, 이상근, 김선운 등.
9) E. Ksemann: Kühl, Letymann, Lagrange, Kuss, 그러나 Schlatter, Bardenhewer, Gaugler, Murray, Kümmel, Römer 7, S. 64, H. W. Schmidt의 견해는 다르다.
10) in 이상근.
11) in 이상근.
12) in 김선운.
13) K. Aland, et al., ed.: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εὐχαριστώ τῷ θεῷ)는 א*, A, K, P, 181, 326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אa, C2, Ψ, 33, 81, 88 사본 등에는 ”그런데, 하나님께 은혜“(χάρις δὲ τῷ θεῷ)로 되어 있고; B 사본에는 ”하나님께 은혜“(χάρις τῷ θεῷ)로 되어 있고; D 사본에는 ”하나님의 은혜“(ἡ χάρις τού θεού)로 되어 있고; G 사본에는 ”주의 은혜“(ἡ χάρις κυρίου)로 되어 있다.
ㅡ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년 2판 1쇄), pp. 297-303. ㅡ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