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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란 중인 롬 7:14-25 중 14-15의 주석
관리자
- 1988
- 2014-10-12 01:18:52
[율법(2:15의 주석을 보라.)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에 대해 크란피일드(C. E. B. Cranfield)는 “율법의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산데이와 헤들람(W. Sanday & A. C. Headlam)은 더욱 구체적으로 “율법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거나 성령께서 주셨다는 의미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물이 신령한 것처럼(고전 10:3, 4) 신령하다. 그러나 율법은 그 성격이 그 근원과 일치한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신령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케제만(E. Ksemann)도 “원래 율법 안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은 그것의 천상적 기원과 본질을 증거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영이시며(요 4:24),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의 본성의 반영(22, 25절)이라는 점에서 신령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성경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한 곳은 마가복음 12:36, 사도행전 1:16, 4:25, 28:15, 베드로후서 1:21 등이다.
[알거니와]는 오이다멘(οἴδαμεν)으로서 ‘영감으로 아는 것’, ‘직관적인 지식’, ‘초경험적인 지식’ 또는 ‘만족스런 확신’ 또는 ‘절대적인 지식’, ‘관념적 지식’ 등을 의미한다. 특히. 바울은 자기의 수신인들이 잘 알거나, 알아야만 하거나, 알기를 바라는 것을 지시할 때 사용하였다(롬 2:2, 고전 6:2, 갈 4:13, 살전 1:5 등).
바울은 율법의 신령성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즉 “죄 아래 팔렸으므로 육신적이라는 것이다”(G. R. Berry).
[육신]은 1:3의 주석을 보라.
[죄 아래 팔렸도다]는 죄의 노예임(요 8:34. 비교: 왕상 21:20, 25, 사 50:1, 52:3)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자아)의 본질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모든 마음과 모든 생각 그리고 모든 행위들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J. Calvin). 따라서 이 표현은 “이미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넘어선 것이다”(E. Ksemann, “Kümmel”①). 죄에게 팔린 바 된 육신으로서의 인간은 끊임없는 내적 분열 및 투쟁에 시달리며 결국에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15】그렇기 때문에(원문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라고 하였다.
[행하는]은 카테르가조마이(κατεργάζομαι)로서 “이루다”(G. R. Berry), “실행하다, 실시하다”(W. Sanday & A. C. Headlam)를 뜻하며, 특히 행동과 그 결과를 뜻할 때 사용된다. [행하지]는 프라스소(πράσσω)로서 “행하다”(G. R. Berry), “도덕적이며 책임적인 존재로서 행동하다 또는 처신하다”(W. Sanday & A. C. Headlam)를 뜻한다. [함이라]는 포이오(ποιώ)로서 “실행하다”(G. R. Berry), “도덕적 성격에 대한 언급이 없는 어떤 결과를 만들다. 그리고 단순히 생명이 없는 기계에 의해 생산되다”(W. Sanday & A. C. Headlam)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세 낱말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의 행하는 것을 ‘알지’(기노스코, γινώσκω: 6:6의 주석을 보라.) 못하노니]란, 인간이 자신이 실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미 죄 아래 팔려 죄의 노예가 되었고, 따라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의 지시를 따라 죄의 뜻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못박는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께 드린 기도의 내용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이었다.
알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바울 자신은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라고 설명하였다.
[원하는]은 텔로(θέλω)로서 “유력하고 확립된 의욕 또는 바람을 뜻한다”(A. Barnes). 호지(Hodge)는 “사랑하고 즐기는 것을 뜻한다.”②라고 설명하였다. 이 말은 \\'미워하는\\'과 대조되는 것이다.
필립스(Phillips)는 “나 자신의 행동은 나를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몹시 싫어하는 것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③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육신으로서의 인간의 분리 상태 곧 두 상반된 자아를 볼 수 있다. 의지적인 결단을 하는 나와 그 의지적 결단과 상반되는 실제의 행동을 하는 나는 동일한 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열된 인간의 비참한 무능력을 보게 된다. 즉, “무엇이 옳은가를 알 수 있으나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알되 그것을 행하지 않게끔 자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W. Barclay).
인간이란 본래 상반된 양면성을 가진 존재이다. 이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 곧 흙과 하나님의 생기로 만들어진 아담(창 2:7)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니버(Niebuhr)는 “창조된 인간이란 그의 위대함과 약함, 무제한적인 지식과 제한된 지식, 강함과 약함, 자유와 속박 맹목과 원시 등의 대조적인 양면성을 내포한 존재이다.”④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적인 인간의 의도와 행동의 상반성에 대한 근거이다.
자신의 분리 상태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이란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인들보다는 율법 추종자 및 양심적이며 도덕적인 인간들이 더 심하게 겪고, 그리고 이들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더 심하게 겪는다.
위와 같은 바울의 고백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언제나 오비드의 저서(Ovid, Metamorphoses Ⅶ, 19, 20)가 특히 대표적인 진술로 인용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욕망이, 또 한편으로는 이성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더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더 나쁜 것을 좇는다”(E. Ksemann). 에픽테투스(Epictetus)도 “그가 원하는 것을 그는 하지 않으며,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는 한다.”⑤라고 하였다. “세네카도 인간이 자신들의 죄를 얼마나 싫어했고, 동시에 그 죄를 좋아했는지에 관해 말했다”(W. Barclay).
“이 문제에 대해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 속에는 두 본성, 두 경향, 두 충동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예스터 하톱(Yester hatob)과 예스터 하라(Yester hara)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는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이 있게 지으셨다는 것을 유대인은 확신했다. 랍비들 중에는 그 악한 충동이 모태에서부터 있었고, 사람이 낳기도 전부터 있었다고 믿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악한 제2의 인간성’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화해하기 곤란한 원수’였다. 그것은 사람을 못쓰게 할 기회를 얻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론상으로 그와 동등하게 아무도 그 악한 충동에 반드시 굴복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모두 선택의 문제였다. 벤 시락(Ben Sirach)은 ‘태초로부터……그는 아무에게도 악하게 행하라고 명하시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범죄할 허가를 하지 않으셨다.’(15:11-20)라고 하였다.
악한 충동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은 율법 연구와 의지와 마음(정신, 지성)이다.……바울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은 이론상으로 사실이다. 또, 틀림없이 그것은 사실이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사실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이 전쟁이 남아 있다. 인간 본성 안에는 바울이 이 죽을 몸이라는 말로 뜻하는 것들, 즉 죄의 유혹과 시험에 부응하는 것들이 있다”(W. Barclay).
육신이란 내적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는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육신이란 항상 성령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⑥ 참조: 갈 5:19-25)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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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Ksemann.
2) 상동.
3) in 김선운.
4) R. Niebuhr, op. cit., p. 181.
5) in W. M. Greathouse.
6) 저자의 갈라디아서 5:16-17의 주석을 보라.
ㅡ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년 2판 1쇄), pp. 290-297. ㅡ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