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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른 무화과나무와 믿음
관리자
- 2705
- 2015-01-14 21:11:32
지정의(知情意)는 세 가지 심적 요소입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지적 능력인 지성으로 살고, 정적인 사람들은 느끼어 일어나는 심정인 감정 곧 기분으로 살고, 의지적인 사람들은 이루고자 하는 굳은 마음인 의지로 삽니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그들 중 대다수는 이기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생활이란 지정의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려고 오신 주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을 보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2.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와 믿음의 위력
예수님 일행이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전날까지도 잎이 무성했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뿌리로부터 완전히 마른 것입니다. 마가복음 11:14을 보면, 예수님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웨슬리(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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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는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자이신 이가 한마디 말로 무수한 생물을 멸망시킨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이 이 중요한 교훈을 죽지 않는 한 영혼에게 더욱 깊이 새겨주는 것뿐이라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석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은 종교적 형식과 위선에 얽매인 유대교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교권자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마른 무화과나무를 본 베드로가 생각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1:20에는 제자들까지 말했다고 했습니다. 랍비라고 한 점과 기적에 놀란 점을 보면, 아직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적 능력을 가진 메시아로 제대로 믿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나 형식적인 유대교인들, 특히 위선적인 유대교 지도층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을 상징한 사건임을 알 리가 없습니다. 아직 그럴 만한 영적 지각이 있는 믿음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간단하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을 에둘러 책망하는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의 원문(ἔχετε πίστιν θεού)은 ‘하나님 신앙을 가져라’로 번역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 신앙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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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위대한 힘입니다. 에베소서 2:8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과 모든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합쳐도 불가능하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불가능한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힘에 대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산을 큰 장애물이나 곤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스가랴 4:7을 보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취지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념과 의지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 의한 기적의 성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음 곧 하나님 신앙이란 인간의 지정의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뜻과 행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J. Wesley)는 영국으로 가는 동생과 함께 포오트 로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그 곳을 떠나 항해할 때의 일을 일기에 썼습니다. “바람이 오후가 되면서 어찌나 강했던지 세인트 헬레나 해협의 어구를 막 지날 때에 나이가 제일 많은 선원이 소리쳤다. ‘모두들 자신을 돌보시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보살피실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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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거의 같은 순간에 돛대가 부러졌다. 나는 배가 가라앉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뱃전에 붙어 서 있었다. (사실 배는 언제 가라앉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강한 바람과 심한 파도를 헤치고 해변까지 헤엄쳐 갈 전망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여 너는 믿음이 없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돛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 두 사람이 그것을 붙잡아 작은 배로 끌어 들였다. 다른 세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다. 하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명령하셨다. 그래서 한 시간 후에 우리는 안전하게 육지에 닿았다.”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말씀, 즉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란 죄악의 욕망이나, 어리석은 소원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추구에 있어서 무제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한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지혜와 전능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인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일치시켜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기도는 받은(엘라베테, ἐλάβετε: 부정 과거 시제) 줄로 믿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믿음의 기도대로 되게 해 주십니다.
얼마 전부터, 중국에서 서열이 높은 자들이 음란과 어머어마한 뇌물 수수로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 훨씬 전에는 일본 수상이 외국 회사로부터 어머어마한 뇌물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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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낙마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성 상납과 뇌물을 바친 자들의 믿음이 보통이 넘습니다. 그 잘난 권세가들이 봐 줄지 안 봐 줄지, 엄청난 일감을 줄지 안 줄지,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비행기나 전투기를 사 줄지 안 사 줄지 어떻게 믿고 성과 돈을 상납하는지……하나님 신앙이 아닌, 죄악과 탐욕에서 나는 믿음도 대단하긴 대단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처조카들도 믿음이 대단합니다, 설날에만 빛나는 믿음이기는 하지만. 양쪽 조카들이 앞 다투어가면서 열심히 세배를 하는데, 삼촌이자 고모부인 제가 세뱃돈을 줄 것을 믿어도 될까 하는 고민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세배하기 전부터 세뱃돈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형님이나 매형이나 저나 처남 등이 목사들답게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믿음이 대대로 물려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 그런지 조카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세배도 하기 전에 세뱃돈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그들이 받은 줄로 믿은 것이 그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 집의 누구들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믿음도 이럴진대 하나님과 하나님 신앙을 가진 성도와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안 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시혜와 신앙인의 기도라는 놀랍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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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한 관계를 파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죄악입니다. 죄악이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신인 관계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저질러진 죄악에 대한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민의 죄 사함을 위한 대속 제물로 오신 구주로서의 선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악으로 인해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의 허물을 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수상처럼, 침략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용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맺음말
사람은 지정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은 그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바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곧 하나님의 선물인 신앙은 죄 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비롯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혜와 신앙인의 기도라는 놀랍고 신비한 관계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죄악입니다. 신인관계와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혜택이란 죄를 회개하고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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