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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소녀 종군위안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예배를 협의
박상연
- 2484
- 2015-01-14 07:45:49
종군 위안부의 최초의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의 발자취를 찿아 동대문교회 천막에 박영규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가칭 소녀 종군위안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예배를 협의 한다고 합니다
수요저녁7시 예배에 오셔서 좋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
김학순 할머니 자료
17) 동대문교회 일본 종군위안부의 故 김학순 할머니 (1924~1997)
- 동대문교회 故 김학순 할머니 -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마지막 의지의 대상이던 아들마저 초등학교 4 학년 때 익사하자, 서울 종로구 창신 동의 한 판잣집에 세들어 살며 온갖 궂은 일을 다하며 동대문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였지만 교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해 동대문교회 교인이셨던 김학순 성도는 故 장기천 감독회장(동대문교회 재임시)에게 본인의 과거를 고백하셨고 장기천 목사의 권고로 폭로할 것을 결심했고, 1년 후에 실행에 옮겼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한민국 국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다. <故 30대 동대문교회 장기천 감독>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천만 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 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 담임목사 故 장기천 감독에 기증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위키 백과 사전 참조)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이라는 증언집에서 참담했던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대한민국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항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했으며, 정신대문제를 국제사회 문제로 확대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故 김학순이 위안부 피해사실을 증언한 8월 14일 이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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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인사 2008.12.16. 편집
[책갈피 속의 오늘]1997년 일본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별세
“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김학순(당시 67세) 할머니가 1991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 그간의 침묵을 깼다. 국내 거주자로선 처음으로 일본 군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따라 만주 지역을 떠돌다 아버지 사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기생집에 양녀로 들어갔다. 평양기생 권번을 마친 16세 때 양아버지에게 이끌려 그 집의 다른 양녀와 함께 중국 중부지방으로 갔다. 양아버지는 이들을 일본군 부대에 팔아넘겼다. 소규모 부대의 가건물에는 이미 3명의 한국 여성이 와 있었다. “그때 일은 말로 다 못해요.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기에 생각을 안 해야지…. 입술을 깨물고, 도망가려다 끌려오고….”(1991년 인터뷰에서)
4개월 뒤 한국 상인(당시 31세)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비운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마저 익사사고를 당했다.날품팔이, 행상, 파출부로 생계를 이으며 400만 원짜리 전세 단칸방에서 메마른 나날을 하루하루 견뎠다. 매달 정부에서 주는 쌀 10kg, 일당 3만원의 취로사업장이 그를 지탱해주는 양식이다.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그는 격분했다. 폭로를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 취로사업장에서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면서 용기도 얻었다. ‘나도 일본에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내가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기록증언 중) 그러나 그는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1991년 12월 김 할머니 등 3명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청구하고 나서야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송 이후 더 많은 피해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 증언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알뜰히 모은 2000만 원을 불우이웃을 위해 기탁하고 일본의 기만적인 국민기금은 절대 수령하지 말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아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997년 12월 16일 새벽, 고통 많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났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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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증언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97년 12월 16일 새벽 1시경 지난 12월16일 새벽 1시경 이대부속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할머니의 빈소는 같은 날 서울 중앙병원으로 옮겨졌고 장례식은 12월1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동대문 감리교회(담임목사 장기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대표 배해원) 등 관련단체들의 참석속에 치러졌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간 김할머니는 1940년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징용됐다. 이후 조선인 상인을 만나 간신히 군위안소에서 탈출해 결혼생활도 했으나 6.25동난 통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홀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갔다.
할머니는 1990년 6월, 일본군은 군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고 발표하기도 했으나, 동대문 교회에서 알게 된 고 이맹희 할머니(원폭 피해자)의 권유로 1991년 7월 '정신대 신고전화'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리게 됐다. 같은 해 8월 온 국민 앞에 일본 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발표한 이후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 1997년 건강 악화로 이대부속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여생을 보냈다.
일가친척 없이 혼자서 기거하던 김할머니는 수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이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 김할머니는 상태가 급속히 나빠진 97년 12월 11일, 유언으로 "절대로 일본의 국민기금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유언과 함께 생전에 다니던 동대문교회에 전재산 2천여만원을 불쌍한 사람에게 써달라며 기증했다. 할머니의 유품과 사진들은 정신대문제협의회(이하 정대협, 대표 이효재) 사료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김할머니의 화장된 유해는 생전의 김할머니 바램대로 천안 망향동산에 묻혔다.
August 19, 2014
외신, 교황 분열과 갈등 극복하고 용서와 화해 주문
-데일리메일, 교황 일본군강제동원 위안부 위로, 전 세계 주목
-남북 불신과 대립적 자세 버리고 화해를 위한 고민 시작해야
외신들이 교황의 방한 마지막까지 주목했다. 교황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것은 일군강제동원위안부(이하 위안부)와 남북 분열과 대립이었다. 특히 외신들은 교황과 위안부들과의 만남에 주목했다. 이번 교황의 방한은 대한민국의 곪은 상처들과 당면한 문제들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방문이었다. 방문 내내 교황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던 관심과 위로, 신자유주의를 싸워야할 대상으로 지목하며 드러난 빈부격차와 사회갈등, 민주주의 강화를 주문해 인식된 대한민국의 비민주성, 살찌고 배부르며 세속화 된 권력과 타협해 사제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성직자들에 대한 강한 질책, 그리고 마지막 날의 위안부와의 만남과 남북분열과 갈등. 마치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교황의 방문과 함께 맨얼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데일리메일은 18일 ‘Pope greets South Korean ‘comfort women’ who were forced into sex slavery by Japan in World War II as he calls for reconciliation ‘even if it seems repugnant’-교황은 ‘혐오스럽게 여겨져도’ 화해할 것을 당부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성노예가 된 한국의 위안부 여성들을 위로하다’ 라는 장문의 제목으로 교황의 마지막 날 여정들을 소개했다. 데일리메일은 특히 교황과 위안부의 만남 그리고 남북분단 상태에서의 교황의 주문을 소개했다.
데일리메일은 교황이 한국 순방의 마지막 미사 집전 중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성노예가 된 피해 여성들을 만나 위로했다며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고, 또 심지어 혐오스럽게 여겨져도’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교황의 미사강론을 소개했다. 데일리메일은 이날 한 할머니가 교황에게 ‘위안부 여성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나비핀을 선물했으며 교황은 즉시 입고 있는 제의에 부착했고 미사 집전 내내 달고 있었다고 전하며 위안부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다.
( 자랑스러운 동대문의 가족 257쪽 <故 장기천 감독의 글> )
(김학순 할머니 기부금 2천만원을 모채로 김학순 할머니 고향 혜산을 바라보며 동대문교회 故 장기천감독이 세운 장백교회 전경)
김학순 할머니와의 인연으로 동대문교회 故 장기천 감독은 연변 등 중국 동북부지방 장백에서 조선족의 교육 및 구호사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