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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목사님
민관기
- 3004
- 2015-01-19 22:04:35
저는 감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각 역사의 중요한 사적과 인물들을 잊고 살었던 것에 늘 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내려놓으니 그것을 타교파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 예를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인물 : 김구 이준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윤봉길 등의 평신도와 헐버트 손정도 최용신 등의 목회자 기념사업회는 감리교회나 교인들과 상관이 없는 이들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기초를 다시 놓읍시다.
1. 수 천에 달하는 감리교회 출신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2005년 감리교회 역사자료실 발간 감리교회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작성한바 있습니다.
그 때 신경하 감독회장은 그 자료를 계기로 기념만이 아니라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이라 약속했지만
후속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 감리교회가 이루어지도록 선교 허가한 이들에 대한 감리교회 차원의 감사가 없었음은 통탄할 일입니다. 선교 윤허가 없었던들 미 감리교회가 스크랜톤 모자와 아펜젤러를 조선에 파송하였을까요?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들처럼 도둑처럼 몰래 들아와 불법선교를 감행하다가 수 만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하 그럴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3. 자랑스러운 역사도 많고 잊은것도 많으며 감추고 있는 것도 많고 부끄러운 것도 많은 감리교회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2005년엔 자랑은 많이하고 부끄러운 부분도 숨기진 말고 드러내긴 하나 전면엔 내세우지 말자였습니다.
감리교회 출신 독립유공자 300 여명과 친일행각 대표적 참여자 목사와 평신도 12인을 함께 발표한게 그 증거입니다.
허나, 4. 이젠 그 전략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온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2007년 친일인명서전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할때 본부를 통해 그 단체에 부당성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곧, 천주교, 불교, 천도교는 그 종파의 성직자만 명단에 넣고 평신도 명단은 다 제외했는데 개신교는 성직자, 평신도 가리지 않고 명단을 작성했다는 점과 각 종교의 친일인사 선정에 참여한 이들의 불공정함 입니다.
즉, 천도교나 불교 천주교는 단일교단. 그러나 개신교는 감장성 구분하지 않고 개신교로 뭉뜽그려 개신교 학자 한 사람인 기장측의 김승태가 심의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개신교는 최소한 각 교단의 전문가 1인씩 5인 이상은 참여하여 명단을 작성했어야 한다는 것이며..
거기에 민문연구소는 종교에 관한 명단 작성의 능력이 없으니 각 종단이 알아서 반성 작업을 하도록
촉구하는 성명 정도로 각 종교에 그 공을 넘기라는 공문이었습니다.
(그 해 천도교는 자 종파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의 행사를 광화문에서 행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명단을 발표했구요. 감리교회관 앞 광장을 "희망광장"이라
한다해서 왜 니들 맘대로 희망?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니까?? 누가 니가 주는 희망을 받기나 한대냐???하면서 "사죄광장"이라 해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왜냐면 감리교회만 역사에 있어서 사죄할게 있지 않고 각 종교나 단체 종교 개인 등 마치 천주교의 고해성사처럼 고백하고 사죄하며 사함을 받으나 신부 개인에게 하는 고백이 하는 이 아닌 공개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의미로 이 곳에서 사죄를 외쳤던 겁니다. 아직도 희망광장이라 하더군요. 성탄절에만 겨우 한 복지단체 끌어들여서 봉투주고 예배 한 번 드리면서)
감리교회는 1945년 광복후 친일민족 행장기 48인을 이미 발표했고 2차로 2005년 발표해고 이 후로도
정확한 실증을 통해 통회하는 절차를 갖겠다는 공문이었습니다.
공문을 보기나 했는지 무시?당하고 답변도 못받았습니다.
(신경하 감독회장은 민족문제연구소에 구체적으로 따지고 항의했어야 옳습니다)
5. 바꾸어야할 전략은 이렇습니다.
2005년의 반응은 대략 이러합니다. 우와~ 감리교회에 이렇게 많았어?라는 자부심이 일시적으로 잠깐 일어나 '정회원 연수' 때 감리교회 독립유공자의 공훈 서열 즉, 김구 이준 윤봉길 대한민국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 주시경, 이동녕, 양기탁, 신채호 등의 2등급 훈장 대통령장. 전덕기, 손정도, 유관순 등 3등급 독립장에 관한 교육이 있기도 했다는 군요. - 4등급 5등급 등 등..
그 후 진전된것은 전혀 없다시피합니다. 2008년 감신대 120주년 기념 심포에 강사로 참여해 민족대표 9인 소논문 발표하고(감신은 지금도 7인 고집) 사진전, 120주년 화보집이 제대로 발간되게하기 위해 애도 써보고 이런 저런 제안도 했으나 아무것도 되진 않았습니다.
하긴, 민족대표 7인상이 6인만 있다가 하나를 추가하여 월북 친김일성 목사인 김창준의 부조상 추가에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1987년 당시 홍정수 학생처장에게 왜 김창준은 뺏느냐 묻고 그 분도 넣어야한다고 주장하여 20 여년)
한편, 친일인사 명단에 전영택 목사를 넣어서 욕많이 들었습니다. 그의 여러 공로가 있으나 그는 조선문인협회, 대동민우회 가입과 감신대에서 황도문학강의 등 민족문제 연구소 기준 3가지 이상의 단체나 친일행적을 가진 이이나 그들조차도 친일명단에 넣지 않은 전영택을 제가 친일명단에 넣어서 그 유족의 대리인격 되는 이에게 전화를 한 백통을 받는 것도 있었고
반개신교 또는 반감리교 또는 친불교나 친북인사들로 추정되는 이들로 부터 인터넷상에서 다 수의 공격도 있었으나 몇 마디로 물리치기도 했습니다.(민족대표중 한용운 빼곤 다 변절했다 이런 망발 많쵸) 각설~~
6. 사죄.
존경하는 박영규 목사님.
위안부 문제는
1) 처음으론 왜의 대표라는 왜왕이 사죄하고 왜 내각이 사죄배상해야하며
2) 담으론 감리교회가 단연코 필히 사죄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민족진영 종교라는 장로교회도 천도교회도 대종교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한 사죄해야 할일이 없고
매국진영 종교라는 천주교회도 불교도 사죄해야 할일이 없고
아무생각없는 종교진영인 성결교회나 성공회 침례교회는 지금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내도 되는데
왜 하필 감리교회만 민족과 그들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야 할까요? 그것도 싹싹빌며..
웅진출판사 무슨 어린이용 역사책인데 그곳엔 특이하게 그림만 보더라도 누군지 한 눈에 알아불수 있는 인물이 나옵니다. 김활란.
저는 개인적으로 김활란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신경이 좀 가늘어서 대차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 개인이 아닌 김활란 때문에 감리교회가 왜 사죄를 이냐구요?
그 근거는 이러합니다.
개화, 근대, 독립과 여성의 학문과 신분 해방 그것중 모든 분야에서 선진 종교가 감리교회입니다.
여성도 하늘이라는 천도교는 여성인물을 키우지 않았고 불교나 유교 천주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장로교회도 여성의 중등고등 교육은 없었죠.
감리교회만이 여성 초중고등 전문학교와 해외 유학에 박사 배출 등 처음 최초 유학생, 박사, 교수 호칭은 죄다 우리 감리교회 외엔 없었다는 점입니다.
허니, 타 교단엔 민족운동이든 매국활동이든 할 여성이 없어요. (개인적으론 몇 있으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참여는 거의 불가능)
감리교회가 1930년 이미 미 여성 선교사 목사안수했는데 타 종교들은 아직도 되니 안되니 타령을 합니다. 또한, 감리교회는 1915년 미 웨슬리안대 출신 하란사를 감리교회 여성 평신도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감리교회의 선진성과 선도 그리고 선각성은 대한제국인 국가도 어느 종교도 감히 범접을 못합니다. 여성문제에 관한한 말입니다.
거기에다 대학과정인 감리교 협성신학교과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를 고등교육기관으론 대한으로선 최초이고 세계를 통털어 2~3번째 남녀공학을 실시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여, 여기에서 배출되어 활동하던 감리교회 여성들은 국외에서 활발히 벌어지는 항왜구국성전 남녀 모두 참여치 못하고 국내 구국활동은 아주 몇 몇의 지하활동만 존재하던 시기 만주사변 - 중왜전쟁 -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왜의 광포파쇼통치가 극에 달하던 때.
유학파건 국내파건 민족진영은 광복이 가까웠다는 것 또는 어떤 결론인가가 조만간 날것이라는 것은
거의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대한인-빛인에게 부억칼 이 외엔 무기로 사용될만한 어떤 것도 허용치 않던 왜가 징집령 뭐 뭐뭐를 발동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총칼같은 무기를 쥐어주고, 1940년과 41년엔 이미 미국 등의 외국인들은 99% 자국으로 강제 출국 당한 상태여서 비빌 언덕도 없이 그냥 벌판에 아무것도 없이 노출된 상태가 우리 민족입니다.
초기 운동가들은 사망했고 현역 운동가들은 감옥에 있고 어디를 둘러봐도 허허..
이 때, 위안부 모집인지 소집인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것이 있었다죠.
마치 별것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왜의 정부 책임을 모면하려는 그들의 술책은 당연히 학도병과 징용(남성 대상)과는 다르게 더욱 치밀하고 유연하며 매우 괜찮은 것으로 보여지게 하여야 이유가 있었을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왜나 가부장 사회여서 밖으로 여성이 나다니는 것을 아무리 개화가 되었어도 극도로 경계하던 때. 조선 땅도 아닌 외국으로 나가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꾄다고 한들 그래 가라할 부모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오란것도 아닌 왜가 하라는 걸 제대로 믿을 바보 대한인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하여, 나온 왜의 전략이 소위 선각자이며 해외를 알고 이름이 알려졌고 명망가라는 여성의 동원입니다.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홍에스더 등. 이들은 어떤 일에든 동원되게 되어있었다 봅니다. 어째든 크든 작든 동원이 됩니다.
아마도, 김활란은 이런 협박이나 위협을 받았거나 느꼇을 겁니다.
위안부로 동원? 그래 남자들이 벌이는 전쟁터에서 여성의 존재란?? 실제적으론 몰라도 거의 유사한 정도까진 느꼇을 것이니 이화여전의 학생들을 끌고 가겠다는 왜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연설엔 나섰어도 이화 7인 전도대 시절의 열정으로 까진하지 않은게 다행이려나?
10만 ~ 30만?의 빛여성들이 온갖 못된 짓을 당하였나 봅니다.
그것을 동대문 교회 고 김학순 집사께서 실명으로 실상을 알렸구요.
왜가 주도하고 감리교회 여성들이 동원되어 위안부(정신대, 성노예)독려하고
그 실상을 세상에 실명으로 알린 감리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그 답.
사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