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의 문제(3) :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롬 9:14-18)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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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04 19:23:24
1. 자유로운 선택<9:14-18>

바울은 앞부분(9:11-13)에 대해 수신인들이 당연히 제기할 질문을 예상하여,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①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자문자답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이다.②
[불의](아디키아, ἀδικία)는 ‘그릇된 행위’(시 44:8, 고후 12:13, 히 1:9, 8:12 등), ‘불공평’, ‘속임’, ‘악한 것’(눅 13:27, 요 7:18, 살후 2:12, 딤후 2:19)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곱과 에서에게 원인이나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구별하신 것은 잘못된 처사가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메 게노이토, μὴ γένοιτο)는 단호한 부정을 뜻하는 표현이다(3:4, 6, 31, 6:2).
바울은 14절의 이유(원문의 15절 첫 부분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라고 하신 응답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긍휼히 여기고]는 엘레오(ἐλεώ)로서 {비참한 자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감정이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다’, 또는 ‘사랑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약 2:3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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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롬 4:1, 6:1, 7:7, 8:31 등.
2) “Mller” in E. Ksemann, A. Barnes, E. Ksemann, 內村鑑三, 泉田 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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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낱말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원조의 손을 뻗치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딤전 1:2의 주석).
[불쌍히 여기리라]는 오이크테이레소(οἰκτειρήσω)로서 ‘딱하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를 뜻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행사란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표준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것이지 유한한 것이 아니다”(K. Barth).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신이 세우신 뜻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자비를 얻을 것이다”(J. Wesley).
이 점에 대해, 바울은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아라 운, ἄρα οὖν)은 앞 구절의 인용구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접속사이다.
[원하는]은 현재 분사형인 텔론토스(θέλοντος)로서 ‘끊임없이 마음에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음박질하는]도 현재 분사형인 트레콘토스(τρέχοντος)로서 ‘계속해서 최대한 노력하다’를 뜻한다(참조: 행 20:24, 고전 9:24, 갈 2:2, 빌 2:16, 딤후 4:7).
전자는 내적인 바람을 가리키고, 후자는 외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오직]은 알라(ἀλλὰ)로서 ‘그러나’ 또는 ‘오히려’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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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의 [긍휼히 여기시는]도 현재 분사형인 엘레온토스(ἐλεώντος)이다.
결국 선택이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지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절대 주권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9:16(LXX)을 다소 변경시켜 인용한 것이다.
원문의 첫 부분에 가르(γὰρ)가 있어 이 구절이 직접적으로는 16절과 연결되고, 간접적으로는 14절과 연결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ἡ γραφή)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표시하려는 바울의 용법이며, 여기서는 바울이 인용한 출애굽기 9:16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φαραώ)는 고대 애굽 왕들의 칭호이었다. 여기의 바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대적한 애굽 왕임에 틀림없다.
모세와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에서, 바울은 주된 두 부류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를 발견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의 [이 일을 위하여](εἰς αὐτὸ τούτο)는 출애굽기 9:16에는 없는 것인데 바울이 보충한 것이다.
[세웠으니]는 엑세게이라(ἐξήγειρά)로서 “‘잠자는 데서 일으키다’, ‘죽음에서 일으키다’(고전 6:14), ‘일으켜 존재하게 하다’, ‘어떤 조건에로 일으키다’”(김선운), ‘계속하게 하다’, ‘보장하다’, ‘조립하다’, ‘건설하다’ (대하 33:19, 스 2:68, 9:9), ‘지명하다’, ‘설립하다’(왕상 12:32, 대상 15:16), ‘일어나게 하다’, ‘세우다’(느 6:7, 단 11:11, 13)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너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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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에도 불구하시고 그를 살도록 보존하여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셨다”(W. Sanday & A. C. Headlam)는 뜻이다. 바로의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반대하는 악역이다.
그 목적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또한(원문에는 카이, κὰι가 있다.)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로 표현되었다.
[너로 말미암아]는 엔 소이(ἐν σοί)로서 원 뜻은 ‘네게서’ 또는 ‘네 안에서’이다. 즉, 강퍅한 바로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반대하여 더욱 핍박하고, 또한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대적한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끔 하신 것이었다. 그 심오한 목적은 세계적 권세자인 바로의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능력](뒤나민, δύναμίν: 1:16의 주석을 보라.) 곧 구원하시는 능력이자 멸망시키는 능력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바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및 목적을 위해 도구로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한 도구였고, 반면에 모세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한 도구이었다.
“파라오(바로)의 반항은 그를 진멸한 자를 온 세계에 영광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며,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E. Ksemann). 그로 말미암아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 특히 바로에게 참 구원자이시고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인류, 특히 바로는 그 때까지 섬겨 오던 우상들과 명백하게 알려진 하나님 사이에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9:14-17의 결론으로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하였다.
[하고자 하시는]은 텔레이(θέλει)로서 ‘바라다’, ‘기뻐하다’, ‘뜻하다’, ‘좋아하다’, ‘결심하다’, ‘의지를 발동하다’ 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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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시고](엘레에이, ἐλεεί: 9:16의 주석을 보라.)는 직접적으로는 모세와 관련된다.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스크레뤼네이(σκληρύνει)로서 ‘탄탄하게 하다’, ‘굳게 하다’, ‘미련하게 하다’, ‘고집을 세게 하다’, ‘둔감하게 하다’, ‘말씀을 버리게 하다’ 등을 뜻한다(출 4:21, 7:3, 32, 9:12, 10:20, 27, 11:10, 14:4, 8, 17행 19:9, 히 3:8, 4:7 등).
여기서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H. A. W. Meyer),③ “단념하셨다”(J. Wesley, “Godet”④), “허락하셨다”(Grotius),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거나 진노를 발하셨다”(J. Calvin), “형벌하셨다”(Hodge)⑥ 등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절대적 주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하나님께서 어떤 이에게는 베푸시고, 어떤 이에게는 강퍅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편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더욱 강퍅케 하신 바로는 이미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강퍅한 자였다는 사실이다(출 1:8-14, 16, 21, 7:3 등).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더욱더 강퍅하게 하여 더욱 완강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케 하셨으며, 따라서 더욱더 크신 권능으로 징벌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권능이기도 하였다.
그와 같이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와 애굽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진짜 구원의 능력을 소유한 참된 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바로 믿어 구원받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출 9:15-16, 10:1-3, 수 2:1-14. 비교: 11:3). 사실상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백성을 징벌하신 것은 곧 애굽의 신들(우상들)에 대한 징벌이었다(7:22, 8:7, 18, 19, 12:12). 이 점에 대해, 웨슬리(J. Wesley)는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강과 곤충과 동물 그리고 애굽 사람들이 경배했던 공기와 태양 등의 제신(諸神) 위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것은 그것들을 섬기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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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김선운.
4) in 이상근.
5) 상동.
6) in 김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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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과 장자들을 모두 죽이는 사건을 통하여 보여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건져내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이 섬기던 대상물이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이라는 것과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도록 그들과 그들의 이웃 나라의 사람들을 건져내셨다는 것을 애굽 사람들에게 확신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 구원받도록 하시는 사랑의 일면인 것이다(사 1:2-6, 요 3:16).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 전의 선택 또는 구원 계획에 따라 부정적 측면에서 바로가 쓰여졌고, 긍정적 측면에서는 모세가 쓰여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코 바로는 영원한 멸망자로, 반면에 모세는 영원한 구원자로 미리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의 근본 취지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요 3:16, 엡 2:8, 갈 2:16, 3:6, 9. 특히, 롬 3:21-5:21).

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년 2판 1쇄), pp. 362-367.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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