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율법의 완성인 사랑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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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8 20:33:38
1. 시작하는 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기 민족만이 구원받고, 다른 모든 민족은 멸망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매개하는 제사장 직분은 율법을 따라 세워져서 속죄 제사 등의 계명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제사 직분도 율법도 구원의 방도는 아닙니다. 구원의 방도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유대와 상관없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 직분과 율법이 변역된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이나 상대적인 양심 행위와 윤리‧도덕 행위가 구원의 방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약속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질이 사랑이신 구원자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완성인 사랑

기독교 윤리의 대강령인 사랑에 대해 바울 사도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빚 보증하는 자식은 낳지도 마라’와 ‘빚 주고 뺨 맞기’와 ‘빚 진 죄인’이라는 말들은 빚을 주거나 빚을 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속담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단 피차 사랑의 빚은 지라고 했습니다. 인간 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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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반드시 져야 할 빚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의 빚의 특성은 한쪽이 채권자가 되고, 다른 한쪽이 채무자가 되는 게 아니라, 양쪽이 다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성은 벵겔(J. A. Bengel)과 케제만(E. Ksemann)의 주석처럼, 사랑 자체는 법적인 빚과는 달리 결코 갚을 수 없는 불멸의 빚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던져진 것도 아니고, 대가의 작품도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작품이 된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또한, 죄와 불신앙으로 멸망할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은 물론,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8 이하를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중한 존재답게 피차 사랑의 빚을 져야 합니다. 필리피(Philippi)는 “사랑으로써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사랑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사랑에 부족을 알게 된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빚을 주어서도 안 되고, 빚을 져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42을 보면,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빚진 후에 갚을 생각을 하지 않든가 떼어먹는 것을 금하는 것이고, 빚을 고리의 돈벌이가 아니라, 사랑의 일환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꾸기보다는 사랑으로 꾸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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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꾸어 주는 자에게 복을 주시며 잘되게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형제자매를 비롯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리새인이었을 때에는 율법의 문자적 준행에 의해 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완성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율법 행위란 끝없는 미완성이며, 따라서 정죄를 받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으므로, 우리 또한 그 사랑으로 남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5:14에서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수많은 계명을 내포한 율법을 완성하거나 성취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율법의 모든 계명은 가장 큰 계명인 사랑 안에 포함되는 것이고, 사랑에 의해서만 고차원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 사는 사람인 “이웃”에 대해 유대인들은 동족까지로 확대 해석했고, 원수나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포함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베푸는 사람 사이를 이웃 관계로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이란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으로 확대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갈라디아서 5:14의 주석에서, “이웃을 자신보다 덜 사랑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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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면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을 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는 자만도 거짓도 겸손도 아니라, 올바르게 자신을 평가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사랑하라”는 아가페세이스(ἀγαπήσεις)로서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자연적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 상대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사랑입니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분출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욱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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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시금석이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일환입니다. 요한일서 4:20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 또는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는가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와 복을 받아야 할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복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영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도움을 주고 유익하게 하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피차 사랑의 빚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 의나 공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소유인 재물과 물건, 지식과 지혜, 능력과 기술, 더 나아가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랑 중 사랑은 영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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