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관리자
  • 3061
  • 2015-02-09 07:02:57
호세아 6:1-3, 요 8:1-11.




누군가 사랑은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5).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을 요구하셨고 또 그와 같이 사랑을 베푸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읽은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을 호세아와 고멜의 사랑하는 모습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요구하시기 이전에 백성들에게 먼저 사랑을 쏟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은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바랍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독생자까지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또 인간들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도 그런 사랑을 요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호세아서에 비추어 그 사랑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육적인 간음이 남편이나 아내 외에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레위기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간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사모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호세아는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백성들을 소나 나귀만도 못한 패역한 자녀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2,3) 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백성들을 보실 때 심히 탄식하시며 슬퍼하십니다.
그런 패역하고 범죄 한 행동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고 명하셨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부정한 자녀 3남매를 낳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나중에는 음부를 따라 집을 나가 방탕하다가 나중에는 거리에서 물건처럼 팔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호세아에게 음부 된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명령에 따라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시장에서 아내를 다시 사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멜은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않고 여전히 음란과 호색에 빠졌습니다.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 5:7).
하나님은 간음한 백성들을 징계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간음행위는 왜 일어나게 됩니까?
육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욱 사랑하는 것이 영적 우상숭배입니다.
영적인 간음입니다.

누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기록하여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부자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인 생각밖에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육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나 인류를 위하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육신의 영달만을 위하면 모험도, 개척도, 개발도 못합니다. 자기의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도 자기중심으로 살았더라면 쓰리고 아픈 고통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신을 생각지 않고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몸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짐으로 많은 결실을 맺는 것처럼 죽고 썩은 밀알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자 하면 살고 내가 살고자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쾌락주의라고 하며 향락주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에 죄악으로 부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죄악으로 부패해지다가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이 하나님보다 향락을 더 즐기다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애굽을 더 사랑하다가 범죄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모두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질투란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보다 세상 줄을 끊지 못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간 ‘데마’를 탄식하였습니다(딤후 4:10).
세상 적인 것은 주님이 오실 때 끝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세상 명예, 세상 권세, 육신의 향락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 사랑은 영원합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부끄러운 비난을 당하였습니다.

고멜은 남편 호세아보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부패하고 부정한 여인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물리치셨습니다.
성도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나,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진노를 당할 뿐입니다.

공관복음서에 인색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율법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칭찬하시며 “잘하였도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청년의 모습이 영적 간음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을 신으로 삼고 살고 있으니 그에게는 영생이 멀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물질관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예수님은 물질 분배 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가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0, 42).

세례 요한의 분배 법은 더 적극적입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잇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사도 바울의 물질 관도 단호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딤전 6:10).
왜냐하면 물질의 욕심이 지나치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고 가롯인 유다처럼 범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명예, 권세, 오락, 향락을 더 쫓아다닙니다.
우상이란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명예가 우상일 수도 있고, 권세가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오락이나 향락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2. 사단은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자 입니다.
사단의 술법은 인간을 타락시켜 정죄하고 하나님께 거역하게 하는 자입니다.
사단의 출현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단은 최초의 인간, 하와을 꼬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사단 마귀의 꼬임은 인간보다 높은 우위에 있어서 속여 넘어뜨리게 하는데 능숙합니다.
하와에게 유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접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한 사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은 유혹을 당하고 맙니다.
사단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욥기서에 나타난 사단은 하나님의 질문에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대답합니다.
“만약 욥도 그 소유물을 쳐서 축복을 거두시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승락을 받아 욥의 모든 소유물을 쳐서 거둬버리고 욥의 자녀 10남매를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런 재난에도 욥은 믿음이 변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다시 욥의 육체까지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기 위해 그처럼 욥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사단은 성자 예수님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아가 40일간 금식하고 기도하실 때 시장하신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그 시험으로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니까 사단은 이번에는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높이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천사들을 명하여 너의 발을 붙들어 살짝 내려놓을 것이니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책망하여 쫓아버립니다.
그 시험에서도 예수님을 넘어뜨리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또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라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사단이 이렇게 유혹하고 시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멸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멸망의 무저갱, 음부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단 마귀는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 합니다.
심지어 모세의 잘못과 실수를 근거로 하여 모세의 시체를 빼앗으려고 천사장 미가엘과 다투기도 했습니다(윧 1:9).
사탄 마귀는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충성한 종이였으나, 그 중에 잘못한 것만 골라서 멸망케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 장은 모세의 잘못은 하나도 보지 않고 잘하고 충성된 것만 보고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탄 마귀와 천사의 다른 모습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모세의 법대로 처형해야 한다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아우성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사탄의 모습이며, 음행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거리에서 물건처럼 팔리는 신세에까지 타락한 음란한 고멜을 다시 끝까지 사랑한 호세아는 바로 천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유혹하고 시험하여 타락케 하는 사탄 마귀의 술법을 본받은 유대인들은 서슴지 않고 행하였으나,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삼고 부정한 자녀를 3남매나 낳았어도 사랑하고, 거리에서 헐값에 팔리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허물을 말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가정으로 돌아와 마음잡고 살아주기를 바라는 호세아의 모습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는 삶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남을 정죄하는 데 앞장서고, 남을 심판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사탄 마귀의 모습입니다.
남이 안 되기를 바라고, 망하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 사탄 마귀의 심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착한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원수까지 용서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며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7곱 번씩 70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했어도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다니의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회개할 때 예수님은 더 사랑하셨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 직전에 회개한 강도를 주님은 낙원에 함께 들어 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탄 마귀는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기를 바라지만 우리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아파하고,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께 고소를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보혈로 씻어 주셨습니다.
사탄 마귀는 형제를 비판하고 이웃을 욕하지만, 예수님은 대신 모욕을 당하고 대신 채찍에 맞았습니다.
사탄 마귀는 인류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음부에까지 들어가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사탄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맙시다.
형제를 정죄하지 맙시다.
미움보다 사랑의 마음을 가집시다.
약한 자를 도와주도록 힘씁시다.
무시로 기도하고 선을 행하도록 힘씁시다.
그것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쉴 곳을 찾았으나 아무도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는 제일 큰 부자 집을 찾아가 사정을 했으나, 문 밖으로 쫓겨나 하는 수 없이 그 집 문간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한 밤중 춥기도 하고 쓸쓸해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마당에서 거위 한 마리가 다니며 무엇인가를 주워먹다가 반짝거리는 것을 주어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주인집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주인 양반의 마고자에 달린 값비싼 보석 단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주인은 나그네를 의심하고 종들을 시켜 기둥에 묶어버렸습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나를 하루만 묶어두시고 거위도 함께 묶어주시기 바랍니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기를 한 나절이 지나 나그네는 주인을 불렀습니다.
“주인 어른, 저 거위의 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거위의 똥을 살펴보니 그 똥 속에서 잃어버렸던 보석이 나왔습니다.
주인은 나그네에게 깊이 사과를 하고 사죄했습니다.
“어째서 제게 진 직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까?”
“주인장, 만약 그 말을 했더라면 당신은 저 거위를 당장 죽이지 않았겠습니까?”
주인은 그 말을 듣고 깊이 뉘우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몇 십 년 전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한 마리의 거위의 생명까지 귀하게 여긴 나그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님이 침착하게 위기의 상황을 처리하신 것은 많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 것임을 봅니다.
먼저 여인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간음 현장에 잡힌 여인은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처형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만약 여인이 죽으면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같은 슬픔을 당하였을 것이고, 여인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가족들에게까지 받을 상처는 언제까지나 크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뿐만 아니라 죽어야 할 많은 유대인들을 살게 하여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여인을 처형하려했으나, 율법의 눈으로 엄격히 보면 자신들의 죄는 더 중한 것입니다.
율법을 말하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율법을 더 많이 어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인이 간음하게 될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인을 간음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음 현장에서 붙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몰래 숨어서 여인이 간음하도록 기다렸다가 잡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죄는 간음 방조죄에 해당하는 자들이며 이 여인의 죄보다도 더 가증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실제로 처형을 받는다면 이들부터 처형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와 율법 앞에서 간음 방조죄에 해당하는 죄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군중심리에 휩쓸려 따라온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까지 살려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도 군중심리에 휩쓸려 무모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 속에는 구경하려고 따라와서 그들에게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착한 행동은 그들도 살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살았습니다.
만약 무리들의 요구대로 “돌로 치라”고 하셨으면 어느 돌이 예수님께 던져졌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사랑을 증거 하신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또 돌이 즉시 날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로마의 법이 아니고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증거는 더 이상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교훈이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 3년도 단축되었을 지도 모르고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죄인 하나까지도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일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고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는 한번도 유익을 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간질병 걸린 자를 고쳐주셨으며, 문둥병자를 치유하셨고, 죽어 가는 자를 살리셨고, 죽은 자도 부활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본다고 자만하지 말고 영적 소경임을 고백하여 스데반 집사처럼, 사도 바울처럼, 영의 눈이 밝아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잘 듣고, 말 잘한다고, 교만하지 말고, 영음을 듣고, 복음 증거하는 시대의 사명자가 되십시다.
우리는 건강한 다리로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만용하지 말고 주님의 능력으로 일어나 복음의 선구자가 됩시다.
우리는 힘있고 건강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사탄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합시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영적 문둥병으로 허물지고 상처받은 죄의 흔적을 주님의 은혜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암몬 장군 나아만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하고 깨끗이 치유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부르짖어 치유를 받았습니다.
죄인들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가던 자도 살고, 죽었던 자도 산다고 말씀했습니다.
생명의 삶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여러분과 저와 함께 임하여, 주님의 사랑 안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아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전 김진형 2015-02-09 아펜젤러 기념교회 부담금 문제 - 결자해지(結者解之). - 문제를 만든 분들이 연회 전에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다음 민관기 2015-02-09 이런 흐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