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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의 문제 (4)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롬 9:19-24)
관리자
- 2353
- 2015-02-18 18:22:15
앞 구절 후반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말한 바울은, 당연히 제기될 질문을 예상하여,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라고 하였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은 “אc, A, B, P 사본들에는 ἐρείς μοι οὖν으로 되어 있고; D, E, F, G, K, L 사본들에는 ἐρείς οὖν μοι로 되어 있다”(W. Sanday & A. C. Headlam). 뜻에는 아무 차이가 없으나, 전자가 보다 가치 있는 사본들이다.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은 “그러면 네가 내게 말하기를”이다.
[하나님이]는 원문에는 없는데 [허물하시느뇨](멤페타이, μέμφεται)가 삼인칭 단수 동사이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어찌하여] 아직도(원문에는 에티, ἔτι가 있다.) [허물하시느뇨]는 “א, A, K, L, P 사본 등에는 τί ἔτι μέμφεται)로 되어 있고, B, D, E, F, G사본 등에는 τί 다음에 운(οὖν)이 삽입되어 있다”(W. Sanday & A. C. Headlam). 전자가 유력한 사본들이므로 전자를 취한다. 그 뜻은 ‘그가 허물을 찾고 있는가’ 또는 ‘허물을 발견하고 불만스럽게 여겨 군소리를 하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퍅케 만들어 놓으시고, 그로 인해 거역한 범죄에 대해서 왜 인간에게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가 하는 뜻이다. 즉, 책임을 물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뜻은 불레마티(βουλήματι)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려 깊은 목적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평범한 낱말인 텔레마(θέλημα)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W. Sanday & A. C. Headlam). 즉,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사려 깊은 뜻(목적)을 감히 [대적하]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인간의 거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기계적인 결정론에서 인간은 도덕적인 책임을 면한다.”(조선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반대자의 질문에 대해, 바울은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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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 사람아](오 안트로페, ὦ ἄνθρωπε)는 그릇된 생각과 주제넘은 판단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힐문하느뇨]는 안타로크리노메스(ἀνταποχρινόμενος)로서 ‘다투다’, ‘항변하다’, ‘논쟁하다’, ‘대항하여 대답하다’는 뜻이다(눅 14:6. 참조: 욥 33:13).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의 궁극적 원리를 깨달은 자라면 하나님께 대해 그런 망녕된 항변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사야 45:9과 29:16에 의존하는 것 같다”(E. Ksemann).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의 동사는 플라스소(πλάσσω: ‘형체를 형성하다’, ‘빚다’)에서 난 것이다. 이것은 무(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어떤 재료를 가지고 형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 예로 창세기 2:7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을 들 수 있다.
지은 자가 무엇을 짓든지 그것은 지음받은 것과 상관없는 지은 자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지음받은 주제에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항변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지은 자의 뜻과 목적에 부합하여 존재하는 데서 자기의 가치와 의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더욱 구체적으로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사야 64:8과 예레미야 18:1-6 등에도 나타난다. “이 구절의 유추법은 좋지 못하다.……인간과 진흙 덩어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고, 진흙 덩이는 물건이다”(W. Barclay).
[진흙 한 덩이]는 동질의 진흙을 가리킨다.
[귀히 쓸 그릇]은 티멘 스큐오스(τιμὲν σκεύος)로서 ‘가치 있는 그릇’, ‘귀한 그릇’, ‘명예로운 그릇’을 의미하고(마 27:6, 9, 히 5:4, 딤후 2:20, 21, 벧전 2:7); [천히 쓸 그릇]은 아티미안(ἀτιμίαν: 원문에는 ‘그릇’이 생략됨.)으로서 전자의 반대를 뜻한다. 이 두 종류의 그릇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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릇 자체의 품질이 아니라 용도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용도의 그릇을 만드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에 속한 것이며, 그릇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릇이란 다만 만들어진 본래의 용도대로 쓰여지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인 타락한 인간(롬 3:10-18)과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무한하며 또한 질적인 차이”(K. Barth)를 말하는 것이다. 하밀톤(Hamilton)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어떤 이는 구원하시고, 또 어떤 이는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형벌을 받을 만한 저주받은 죄인으로 버리신다.”라고 해석하고, 김선운 님 역시 “하나는 구원, 다른 하나는 멸망이다.”라고 하지만, 둘 다 너무 비약적인 해석이다. 黑崎幸吉은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마음대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만든다는 것과 같은 뜻은 없다는 데 주의하라.”라고 하였다. 반즈(A. Barnes)도 “사도는 여기서 원래의 인간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바울의 취지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예정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혹은 귀하게, 혹은 천하게 사용하시는 은혜로운 절대 주권자이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웨슬리(J. Wesley)는 “비록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처사가 제멋대로, 폭군적으로 처리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무한히 현명하고 선량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가 판단의 가장 적절한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확약을 했듯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으로 거절하는 자에게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하였다.
[진노를 보이시고]의 [진노](오르겐, ὀργήν)는 1:18의 주석을 보라.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의 [능력](뒤나톤, δυνατὸν)은 1:16의 주석을 보라.
[멸하기로 준비된]의 [준비된]은 카테르티스메나(κατηρτισμένα)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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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다’, ‘제자리를 잡다’, ‘결점을 보충하다’, ‘적합하다’, ‘적용하다’, ‘준비하다’, ‘고치다’ 등을 뜻한다(마 4:21, 갈 6:1, 히 10:5, 11:3).
따라서, [멸하기로 준비된]은 ‘하나님께서 멸망을 위해 준비하신’(“H. A. W. Meyer”,① “Augustine”,②, M. Luther, p. 84, J. Calvin)이나 ‘자신들이 멸망에 적합하게 한’③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에 적합한”(W. Sanday & A. C. Headlam)을 뜻한다. 특히, 바울은 의도적으로 본절의 준비된을 23절의 “예비하신”(프로에토이마센, προητοίμασεν)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전자는 후자와 달라서 예정이라는 의미는 거의 없다. 오히려 멸망에 이르게 될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며, 죄의 연고로 멸망하기에 충분한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말한다”(泉田 昭).
[진노의 그릇]은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해 응당 멸망할 자, 즉 영원한 멸망에 적합한 자들을 가리킨다. 물론, 이들은 불신의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즉시 진노를 발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오래 ‘참으심’(마크로튀미아, μακροθυμίᾳ: 2:4의 주석을 보라.)으로 ‘관용하시고’](에넹켄, ἤνεγκεν), 즉 관용 또는 인내하셨다. 하나님의 인내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이미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고 하였다.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προητοίμασεν εἰς δόξαν)는 ‘[영광](1:23의 주석을 보라.)을 위해 미리 준비한’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黑崎幸吉, 김선운). 이 점에 대해, 김선운 님은 [예비하신바]의 시형이 과거라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또는 영원하신 선택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비하신바]가 과거에 완료되었음을 뜻한다고 해서 반드시 영원한 예정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22절 후반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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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in W. Sanday & A. C. Headlam.
2) in 김선운.
3) “Chrysostom, Theophylact, Oecumenius, Grotius”(in W. Sanday & A. C. Headlam), J. A. Be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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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대조적인 것을 미루어 역사적 과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④.
[긍휼(엘레우스, ἐλέους: 9:15의 주석을 보라.)의 그릇]은 앞 구절의 “진노의 그릇”과 대조되는 것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의 [그 영광의 부요함](τὸν πλούτον τής δόξης αὐτού)은 “하나님의 자비”(J. Calvin)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및 하나님의 행사와 행하시는 모든 것의 풍요로움을 뜻한다(엡 3:16). 이 풍성한 영광은 장차 [긍휼의 그릇] 곧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인간이 누릴 영광이기도 하다(롬 8:28-30).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따른 부르심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반면에 회개하고 믿는 인간에 대해 자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게 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항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앞 구절의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을 가리켜, 바울은 그런데(원문의 24절 첫 부분에는 카이, καὶ가 있다.)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따른 부르심이란 차별적으로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한 자 곧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 긍휼의 그릇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름받은 공동체인 교회의 독특성을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케제만(E. Ksemann)은 “교회가 유다인 사회나 혹은 이방인 사회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옛 백성과의 연속성 속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요 새로운 계약이다.……유다인과 이방인이 모두 속해 있는 교회는 어떤 종교 집단이나 민족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부르신]은 에칼레센(ἐκάλεσεν)인데, “이 낱말은 교회인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어근이다.”라고 한 벤겔(J. A. Bengel)의 설명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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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조: “Shedd, H. A. W. Meyer, Philippi, Hodge, Murray”(in 김선운), 黑崎幸吉.
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년 2판 1쇄), pp. 367-372.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