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멸시받는 것도 환영한 사람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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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24 13:27:31
믿음으로 멸시받는 것도 환영한 사람
열왕기하 4:25-31, 마태복음 15:21-2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갈릴리를 떠나셔서 두로와 시돈지방을 방문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지방은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국경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벗어난 일이 없었는데 두로와 시돈지방은 예외로 유대인들의 지역을 벗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들을 비난 하셨으니 그들에게 어떤 공격이나 해를 받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해를 당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직은 세상에서 하셔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아마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 조용한 곳을 찾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국경지역을 찾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으신 예수님은 깊이 생각하시며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준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대한 이해와 각오를 갖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두로와 시돈지방 이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지역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당시 도덕적으로 문란하였으며, 우상숭배가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도시로 취급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도시의 경계지역의 어느 한적한 곳에 머무르시며 거닐고 계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시기 위해서 두로와 시돈지역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전진하시며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사망의 올무를 깨뜨리시기 위한 전력을 새롭게 정비하시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시기 위한 준비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곳에는 병들어 죽어 가는 딸 하나를 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어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그러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못 들으셨을 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청각에 도달하지 못하는 먼 거리의 탄원소리였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간구를 이미 알고 헤아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그를 부르시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벳바게의 어떤 사람의 집에서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을 보내어 풀어서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음을 알고 깨우러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며 베다니로 찾으셨습니다.

그 여인을 마태는 가나안인 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확실한 것은 그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가나안의 족속은 조상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과는 철천지의 원수지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7족속과 31왕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의 백성들을 모두 죽여서 진멸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더러는 용케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여자는 용케도 살아남은 백성들 중의 후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짖는 그 여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귀찮아서도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님께 접근하려할 때 첫 번 당하는 방해요소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동정심이라 하기보다는 귀찮은 사람을 빨리 보내려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요구에 대답하시기를......“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자는 믿음의 한 계단으로 올라섰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며 다시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면전에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참으로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을 “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을 “개”라고 부르면 아주 경멸하는 큰 욕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개”라고 취급하는 것은 아주 큰 욕입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첫째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두 번째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문화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해서 사람취급도 하지 않고 “개”라고 부르는 데도 조금도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받은 것입니다.

왜 그런 욕을 하느냐하고 항의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뒤로 돌아서서 가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욕을 먹으면 화를 내거나 악담을 하며 달려들어 보복을 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길거리로 나아가 떠들며 소란을 피울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직접 항의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원한을 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욕을 먹으면서도 말대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뻐하실 믿음의 성숙한 단계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지혜와 여유 있는 대답, 그리고 인내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여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자가 구하던 딸의 병까지 고쳐주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 시로 이 여자의 딸은 죽을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어떻게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1.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며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소문으로 들었기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다윗은 의리가 있는 조상이며 약한 사람들의 탄원을 들어주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접근하면서 그의 믿음은 점점 더 자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자기 딸을 병에서 고쳐달라고 의원 예수님을 찾아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동정을 구했으나, 다음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며 애원하는 말은 좀 더 성숙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경에서 나온 헬라 이방 여인”에게서 이런 신앙고백과 간구가 나온 것입니다.

부정하고 불신앙의 사람들만 사는 지역에 살던 여인이 어려움을 포기하지 않고 이와 같은 신앙적인 애원을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여인은 죄악의 도성에서 고고히 피어나는 신앙의 꽃을 피우는 숭고함이 엿보이게 하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행동과 모습에서 부정하다고 인정되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세상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신성함이 충만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던 소문에서 느낀 능력자나 선생이나 권위자, 그 이상의 거룩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부르짖음은 인간의 모든 요구에 응답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변하여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참선지자와 가까이 살면서도 믿지 못하고 교만하며 세상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신앙은 더욱 놀랍게도 삽시간에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였습니다.
믿음의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도 이 여인처럼 날마다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은 진심으로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상원의원 한 사람이 벨기에 대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미 상원의원의 부친은 벨기에 대사에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당황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벨기에 대사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그 상원의원의 부친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화환들이 왔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화환에 이렇게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에게 질문을 한 단한분의 미국인에게........ 벨기에 대사로부터”

이 여인은 먼저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여 졌습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피부에 느껴지지 않아도 될 줄로 믿고 이룰 줄로 믿고 응답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여인은 예수님의 멸시하시는 말씀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도 감동하시리만큼 놀라운 믿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지금까지 뵈었던 적도 없었고 말씀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교제도 없었지만 칭찬을 받을 만큼 큰 믿음을 지녔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만한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예수님께 인정받을 믿음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2. 절망 중에도 소망과 여유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딸의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고통당하고 있는 한 그 어머니의 심령은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를 가장 기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쳐보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을 것이고 그 어느 방법으로도 효과가 없을 때에 그 여인은 심히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절망 중에도 그 여인은 믿음 안에 예수님을 의지하려는 소망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모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중에서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작은 씨앗이 생명이 있을 때 무거운 돌을 들추고 새싹이 자라나듯이 믿음은 모든 절망적인 방해요소들을 극복하고 이기게 합니다.

믿음을 가진 이 여인은 예수님의 멸시도 아멘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만약 이 여인에게 그런 고통이 없었더라면 육신적인 만족만 찾다가 주님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생애를 마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되었으니 오랜 고통은 오히려 이 여인에게 큰 축복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고난 중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4선 대통령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절망하게 될 때 이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 엘리네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라고 물었습니다.
엘리네는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다리, 손,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이 말에 용기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에 도전하여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루즈벨트입니다.

모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축복으로 찾아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여인은 소망에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목사가 여 성도에게 “개”라고 욕을 했다면 “옳소이다.”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길거리에 나아가 어디 저런 목사가 있느냐고 외치지나 않을 까요?
이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오는 모든 멸시와 천대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 안에서 딸을 고치는 일이라면 자신의 어떤 희생도 멸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형식이 아니오.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붙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이러한 소망은 모든 고난 중에서도 여유를 가지게 했습니다.
여인의 소망은 진지하게 구하고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보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개로 소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와 같은 개에게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게 하십니다.”
얼마나 놀랍고도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의 대답입니까?
착한 성품을 지닌 여인은 대답도 착하게 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무디 목사가 시무하던 시카고교회가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빈정거리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교회가 불에 타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무디 목사는 “나는 진작부터 하나님께 더 큰 교회를 짓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왔소 이제 철거하는 비용까지 들어야 했었는데 모두 불에 탔으니 철거비용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큰 교회를 짓는 일만 남았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 목사는 영국에 가서 여러 번 집회를 했고 은혜를 받은 영국교회의 성도들의 헌금으로 마침내 더 큰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쌓은 착한 성품 속에서 착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여 주께서는 내 위치를 아시나이다. 나는 거리의 개와 같습니다. 당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입니다. 하오나 이제 당신은 이곳 변경에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나이다. 나는 개 같은 사람이나 당신의 상아래 있으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나이다. 죄인들을 용납하시려는 주시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자녀들의 떡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게 허락하옵소서.”
이렇게 착하고 어질게 대답을 할 때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이 여인의 재치 있고 유순한 대답은 주님께 큰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소망이 중도에서 포기되지 않도록 감정과 언어에 주의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소망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는 지혜와 재치를 보였습니다.
원대한 소망과 꿈을 더욱 짙게 펼쳐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3. 사랑과 인내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벵겔은 이 여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여자는 자기 딸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이 여자는 이방인이었으나 심령 속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 모성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녀 되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계시듯 여인은 딸을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를 리 없고 구분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문제로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딸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사이는 조상 때부터 철천지원수와 같았으나 지금 예수님께 찾아 나올 때에는 그런 관계를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방지역에서 사람에게 “개”취급을 했으니 오해나 불평이 나올 만도 한데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한바탕 떠들고 싸울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시기와 교만은 경쟁자가 있을 때 나타납니다.
경쟁자가 없으면 시기와 교만은 사라집니다.
싸움과 다툼은 상대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치열하게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은 끈질기게 예수님께 애원하고 매어 달렸습니다.
예수님의 앞으로 달려 나와 엎드려 더욱 간절하게 도와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을 상하지 않았고 “개”취급을 받아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여인에 주신 은총은 부스러기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자녀들에게 주시지 않았던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님의 눈물어린 기도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딸을 사랑하고 딸의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간절히 구하는 여인을 예수님은 큰 축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공포와 두려움과 의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후 아들을 전쟁에 내어보내고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무서운 합병증을 앓다가 죽은 미국인이 1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돌아와서도 전쟁의 공포와 두려운 환영에 시달리다가 죽거나 폐인이 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4:25-31, 수넴 여인이 자식을 사랑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주의 종 엘리사를 대접하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그 슬픈 기색을 안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수넴 여인은 말없이 엘리사에게 나아가 두 다리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외아들의 죽음을 토로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탄 마귀는 우리가 기도 할 때 응답이 더디고 축복이 더디 임한다고 좌절하고 실망하도록 낙심시키려 온갖 수단을 다 부립니다.
하나님은 너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니 포기하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매어 달려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사탄 마귀가 계교 부리는 상징이며, 골고다의 무덤은 사탄의 추종자들인 인간들이 파낸 기술의 상징이며, 무덤을 막은 돌문은 사람들의 힘의 상징이며, 돌무덤에 찍은 인봉은 종교의 지도자들의 권위의 상징이며, 무덤을 지킨 군병들의 파수꾼들은 정치인들의 권력의 상징이었으나,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이기시고 마침내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로 이 여인은 우리에게 끝까지 인내하고 끊질 기게 기도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봅니다.
이 여인의 사랑은 모든 허물도 불평도 경멸도 덮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여인의 그런 여유 있는 사랑은 주님의 더 큰사랑을 덧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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