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지도 관철

민관기
  • 2506
  • 2015-03-13 06:35:01
왠 종북같은 표현이네 그러구 보니.

내가 9살이었던가? 31절 노래를 처음 배웠던거 같다. 정확히 표현하면 유관순 열사 추모가이다.
3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속에 갖혀서도 만세부르며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졌대요. 하는 가사다.
이 노래를 배운 후 난 그 3월의 하늘을 가만히 우러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국제시장이란 영화는 안 봤지만 아마도 비슷한 장면이 있나보다. 무슨 태극기 하강식 경례장면이라던가?

실제 근데 그랬다. 3월 하늘을 가만히 우러르니 가슴이 울렁이고 하늘은 일렁임이 느껴진다.
무언가 말로 표현이 안되는 그 벅차오름이랄까?
해서, 협성 부흥단 총무인가하시는 차귀열 목사에게 난 목사님 차씨 기원은 하나님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던데서 기원됐다고 봐요. 했더니
아주 그냥 조아라 한다.
설레임의 수준과는 비교가 안되는 벅차오름. 억지로 누르려해도 도저히 가슴이 터질것같은 그 느낌을 하늘을 우러러보기만 해도 느꼇었다.
잠시만 우러러도 그러해 일부러 하늘을 우러러봄을 5초정도로 제한한적이 있기까지 하다.
원방현 장롯님처럼 그래서 눈감고 우러렀다. 조금 가슴이 잔잔해 지더라.
근데, 요즘은 안 우러러진다. 느낌의 퇴화런가 한다. 감아도 떠도.


조직지도관철이란 무슨 말인가?
[잠시 후 이어감]
물 한잔 마시고 검은 하늘 한 번 보고..

그 기미년의 삼월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고 여러 방면으로 기념예배나 기념탑에 대한 헌화의 예도 갖출것이다.
일단 여기선, 28독립선언, 러시아혁명 영향, 김일성 선조 주도, 신한혁명당 주도, 감-불-장-천 지도, 광무황제붕서 영향, 학생운동 지도부 봉기, 윌슨의 민족자결론 영향설 등 등 등을 일단 다 뒤로하고..

조직지도 관철이란 관점에서 약간의 논설을 하고자 한다.

조직이 누군가에게 그 노선을 관철했다는 것이고 조직의 성원은 그 지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였다는 것이다.
일단 감리교회를 보자.
1. 초대주재선교사의 주재부터 국권의 수호와 입장을 같이하는 교회적 지도노선을 갖고 있었다. 본국 정부 국무부와는 그 입장을 달리한 것이다. 헐버트의 본국 대통령 비난인 "미국의 루스벨트는 친구인 조선을 배신했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겼다"라고 본국을 맹비난했다.
본국의 입장에 따라 친왜의 대표 선교사로 꼽히는 왜주재 조선 감리교회 감독인 해리스를 일개 주재선교사 주제에 감독을 노블도 맹비난했다. 스크랜턴은 해리스에 저항해 감기교회 선교사직도 던진다. 하고, 그는 맹렬 민족운동가 전덕기를 자신의 후임으로 상동교회에 부임케하고 본인은 여전히 상동교회 자택에 머물며 뭔가를 한다.

2. 충군애국 노선을 견결히 관철했다. 실상, 반외세 반봉건 노선 동학은 농민전쟁을 발발시킴으로 조선의 국력을 급속히 쇠약케 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감리교회는 조선의 국권을 지키는 입장의 선교 전략을 구사했고 실질적으로 동학도들의 농민전쟁의 주장 내용을 실질적으로 계승한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1885년 주재하기 시작한 감리교회는 황제께서 붕서하시기 전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을 잃은 적이 없다. 그 증거들로 대군주폐하 만수무강예배, 명성황후 추모예배, 황태자저하 탄신예배와 독립협회의 설립과 신문의 발행이나 독립문의 건립과 독립관의 건설 등 모든 분야에서 황제의 뜻에 복종하며 황제의 아관파천 철회를 위해 노력했고, 황후의 원수를 감리교인 김구가 왜 장교를 처형하며 일정 갚았으며(어지 황후와 그 깔난 장교가 비교가 되리요마는 그래도 황제는 감사히 여겨 김구가 사형 되는걸 막았다), 1905년 을사늑결시 대한문에서 도끼를 메고 까지 상소문을 올려 상소문이 황제에게 전달되게하는 등의 황은에 보답하였고 종로로 전선을 확대해 투석전을 벌였다.

황제는 감리교인들의 뜻을 알았다. 하여, 헐버트, 이준을 비롯한 헤이그 특사 3인 등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황제는 감리교회 선교사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맡겼다. 왜? 믿으니까.
*. 유교는 척사에 충성심은 있으나 외국어 몰라 배제.
*. 천도교는 국력 갉아먹었고 충성심 없어 배제.
*. 장로교는 충성심도 외국어도 몰라 배제. 내가 하사해준 광혜원 하사명 싸가지 없이 이유 설명도 없이 제중원 개명.
*. 천주교 불교는 물어볼것도 없어 배제.


3. 북남감은 10년차를 두고 내조선하였다. 북감은 1885년. 남감은 1895년. 이 둘은 본국에선 거의 웬수다. 그러나 조선에선 아니었다.
황제황후께서 북감에게 배재, 이화, 보구여관 등 황명으로 이름을 하사했으니, 니 들은 10년 나중에 들어왔고 우리완 다른 남감이잖아하며 배척하지 않았다. 스크랜턴 목사는 자신의 전도인인 김흥순 등을 대부인은 백헬렌?등을 남감 소속으로 일하라며 보내줬다. 사실 리드, 캠벨을 언제 봤다고..
김흥순 등은 남감 개척 전도인으로 북감을 떠나 남감 소속으로 충성을 다했다. 어디면 어떠랴~ 나중 목사안수 받으시고.
[스크랜턴 모자는 남감에게 선교부지를 알선해주었다. 부동산 수수료 없었다. 선교구역도 양보하고 자신들의 교회도 양여한다. 뭔 이런 일이 다있나?]
야~ 본국에선 북남 다르지만 여기선 같이하자의 정신으로 했다. 본토인 목회자도 같이 양성하자. 여남모두 이견이 전혀 없었다.
신학교의 이름이 協成 협력하여 서다. 이중 여학교의 교수로 활동한 이중 대한민국으로 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이가 여학교의 헐버트와 하란사이다.

4. 왜는 민족의 모든 조직을 파괴했다. 오로지 종교만은 외교상의 문제로 파괴는 못하고 탄압을 했다. 감리교회 선교윤허 이전 100여년전부터 불법선교해 학살? 당한 천주교회는 이제 선교 자유 얻어 우리 세상이려니 했는데 이런 이게 웬걸~ 본국 정부 천주교 선교부는 워낙 관리해야할 식민국이 많아 식민국도 아닌 선교자원을 투입을 대규모로 못해요. 돈없어요. 인력이 부족해요. 아놔~ 이런 개짜증. 그렇다면 할 수없지.
조선에 온 개신교를 압사할 방법은 통감부, 총독부와의 결탁에 있음을 간파. 대한 천주교인들의 고해성사 내용을 전국의 사제들이 수합. 본부 명동성당 뫼텔에게 보고. 뫼텔은 총독 정무총감에게 보고. 일체를 파악하고 있던 총독부(이렇게 부르는것도 짜증 나지만)신민회사건, 안악사건, 데라우찌 암살음모 사건, 무관학교 설립 사건 등으로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올리셨어여. 하고 뫼텔은 자신의 일기에 기록.

5. 하여, 감리교회의 또 다른 전략. 그래 니들이 그랬어. 이 때 현순 감리교회 주일학교 총무로 활동 게임 스타트~~
주석필요 : 주일학교란 지금의 아이, 청소년학교가 아니랍니다. 전국 500 여개 교회 주일학교 건설과 배움. 주역은 장년. 청장년이나 장년이 주일학교 학생입니다. 외교권을 가진 주재선교사들인 노블 등의 역할이 중요했죠.
왜것들. 아~ 저것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자신들과 동맹인 미 영선교사들이니 뭘 어쩌기가 어려워. 그냥 씩씩거리기..
하여, 현순 목산 전국을 거의 맘대로 순회 장년 주일학교 500 여개 조직.
그 중간엔 물론 전도부인들이 양성되고 투입되고 지역에 기독교 학교 설립과 우수학생 서울로 유학 추진

[갑자기 자판두드리는데 중단 영자로만 약간 자증]

다시 복구 시작.
현순이 그걸 왜? 두 가지.
*. 민족 조직의 파괴와 교회에 대한 박해로 민족전선에 이상 징후. 뭘 어덯게 회복시킬 수단과 방법이 없어. 상동 부담임과 정동 담임을 하고 새벽은혜를 체험한 그.
**. 한학 실력, 부친의 개화성에 영향, 미국, 왜의 언어나 뭐 이런것에 능. 외국어나 수리학이 되요.
이렇게 본다면 현순. 이미 기획되어 있던 31후 정부 설립의 적임자로 내정되어 상해 특파. 정부 구성 활동.
[현순 목사의 딸 앨리스 박헌영의 애인으로 월북. 박현영과 함께 간첩혐의 처형]

6. 31은 당연히 말할것도없이 33인의 지도자에 의해 지도 전달.
여기에, 15인이 더 있어 31의 33인에 48인으로 명명됨.
선언서의 전달이 중요한게 아니고.. 당연하며... 자신의 영역이나 지역을 지도 관철.
수 만장의 선언서를 이미 받았고 지역에서 필요한 더 많은 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수고 만만치 않음. 엄청 많이 수고. 다 아실거고..
여기서, 영역이라함은 특히, 학생운동 영역을 말하는데 YMCA회우부 간사 박희도의 학생세력에 대한 강력한 지도 관철.
그야 당연, 감의 목회자들의 지역 철저 관철. 장의 지도자(평신도 포함이기에 지도자)지역 물론이지만, 장의 이갑성 자신이 맡은 지역 책임을 못져. 천도교는 논외합니다. 불교 승려 한용운 무척 노력했으나 백용성 한 명 끌어들이는데 불과.

31 48인중 하나인 수원 삼일학원(수원종로교회, 스크랜턴 모자 설립, 대한인 이하영, 임면수, 나중석둥)의 교사 김세환. 경기이남과 충청 지역 책임. 33인에 버금가는 30명의 선언서 가입 도장 서약 받음.
이미, 33인 결정되었다 불태움. 경기이남의 거의 모든 목회자 서명. 수원 삼일학원이 경기와 충청 감리교회 31 전담.
기실, 김세환은 평신도. 목사들이 그의 의견을 따라 운동 서명하므로 평신도 운동 지도노선 관철.
거기엔 미국유학 목사인 동석기도 포함되었으며 수원, 오산, 안산, 화성의 31과 충청의 모든 지역 지도노선 관철.

7. 여기서 지도관철 안되는 세력
천주교 : 워낙 철저한 친왜라 말을 붙이는 것조차 안 됨. 신민회 사건, 안악사건, 데라우찌암살음모 사건 등에 천주교회가 관여되었을 것이라
민족운동 세력이 관찰하고 있었다고 판단되며 이는 31에 전국의 사제들이 명동성당 뫼텔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길 이번 폭동에 우리 신자들이 하나도 참여 안했음을 다행으로 보고한다는 내용에서 알 수 있고 인천 박문여고인가는 불기와 왜장기를 달고 학교를 운영하였다는데 감리교회 영화학교 학생들이 왜장기를 떼고 그들이 달기를 반복하였으며, 박문이란 이름 자체가 이등박문 추모 사찰인 장충단 공원안 박문사의 이름을 딴 것이라하니 말을 해야 무엇하리요.
조합교회 : 왜식 개신교로 감리교회들을 주요 공략 대상으로 선교하였다고보며 이는 상동교회 수리학 교사이던 유일선이 조합교회 교인.
조합교회 지도자인 것 자체로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재.

담으로 매우 중요한 유림.
조선왕조 500년의 주인 유학 전래 천년의 유림. 조선 독립 선언 반대. 대한의 병탄의 1차 책임이 황권에 있는듯 사람들을 홀리지만 기실 조선은 유림지배 사회임은 명백. 1차 책임은 니들이고요. 2차는 마지막 남은 국력 갉아먹은 동학이심을 아세요.
경술국치 곧, 대한왜 병탄 1910년 왜는 유림 1만명에게 작위와 은사금 수여. 그중 6000명 받음.
이제 독립해야지 않느냐는 선언 당사자들에게
*. 왕정 복고가 없는 선언에 동의 못한다.
**. 머리 깍고 양복입은것들과 국사를 논의 할 수 없다. 거부. 33인에 유림없는 두가지 이유. 당시 인식능력으론 이해하지만 니들도 마니 좀 구러타 잉.
31선언후 심산 김창숙 유림하나도 없음에 통탄. 선언은 아닌 청원인 파리장서 기획. 유림 대거 참여. 이 때 왜는 31보다 더 놀랐다. 아니 유림은 우리가 이미 다 꼬셔놨는뎅.

그러타.
천주교, 조합교회, 유림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지도를 관철한 것이다.

그럼 우린,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
위의 모든것에 합해 감리교회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이라나 하디라나 모 그런 운동이 있었댄다. 하물며, 대한제국 강화 대령출신이고 상동감리교인이며 전도사이고 한인사회당 조직 사회주의자이기도한 그는 100만명이 교인이 되는 때가 조국이 독립이 될때라고 외쳤단다. 고맙다. 성재.

성령운동=양심회복운동. 이것에 그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 운동으로 민족은 옛 민족의 빛정신을 알게되었고 일정 회복하였다.
아~ 나 빛이었구나. 난 직업의 호칭이 백정, 농사, 장사 모 이런거라 빛 아닌줄 알았어. 감사와 감사의 눈물과 회개와 자복이 난 본래 빛이었구나란 자각. 뱃속의 마음이 일렁이며 느낌이 가슴을 감돌며 한 마디로 휘몰아쳐 이대로 살지말자의 자각.

이런 것이 아니라면 선언 정보를 알고있던 최초 십만?중 어떻게 왜정에 정보를 하나도 안 줬을까요? 어찌 천도교 아류 시천교나 천주교회나 조합교회회나 이들에겐 단 한 명에게도 시위 정보가 안 알려졌을까요? 알려졌다면 당연히 왜정이 고발해 돈 좀 받았을 텐데.
혹, 이런 의문이 안 드시나요??
미리, 뭔 일이 이 나라 어느 동네에서 일어날거라 알았던 왜정이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없었다.
31로 광무황제 국장 예행연습하던 하세가와가 사색이 되어 이를 어쩌면 좋겠소라고? 조선 불교 평신도 대표 이완용에게 상의드리신건
왜 일까?


서로는 서로에게 조직의 지도노선을 관찰했다.
매우 철저하게.
우린 지금 뭔가요?
이건 모 교인인지 목회잔지 아무것도 아냐. 그 글을 제가 내려 드립니당.

여러가지 말고 하나 배울 것중 하나 :
기독교조선감리회의 1930년 탄생은 40년 걸친 것이었더라.
개혁이나 뭐 이런거 그냥 쉽게 금방 되는거 아니에요.

&&. 참고 ; 글의 뭐상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부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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