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도 감리교회 지도자들이 세웠다.

현종서
  • 2444
  • 2015-03-11 06:38:05
우리는 3.1 만세운동을 자랑스러운 국민운동으로 기억한다. 그 운동 역시 전 국민들이 참여 하였을 지라도 소수의 민족 지도자들이 기획하고 은밀히 준비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3월 1일 오후 2시 까지 일본 인들은 물론 선교사들도 전혀 예측 못한 일이 서울 평양 대구 기타주요도시와 시골 마을 곳곳에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니 교회가 많고 기독교학교가 있고 기독교학교 유학생이 있는 마을에서 부터 일어나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일어난 한국민의 무저항 독립주장 만세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본은 물론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정대철 의원의 말대로 "이 운동에 자극받아 세계의 피압박 약소국가 민족들이 독립운동의 계기를 일으켰으니. 중국 북경대학 중심의 5.4 운동,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에 그리고, 필리핀,베트남, 이집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운동에 우리 국민들을 모두 자존감과 자주독립의식을 회복하면서 일본의 강제합병과 제2국민 취급에 저항하여 여러방식 여러모양의 독립운동과 투쟁에 나서게 하였다.
그 운동은 7인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천도교 불교지도자들을 포함한 민족 지도자 33인을 대표로 하여 행동대원으로 기독교기관 젊은 세대들이 앞장서서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일어난지 한달만에 중국 상해 불란서 조차지에 한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는 데 이 일은 3.1운동에 이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3.1운동을 준비한 기독교지도자 7인과 협상에 호응한 천도교 불교지도자들이 합세한 33인의 민족 대표의 밀사로 현순 목사가 3.1운동 거사 일주전에 그들이 준 마련해 준 자금과 최남선의 독립선언문을 가슴에 품고 기독교 부흥사요 감리교회 주일학교 총장으로 전국을 다니던 모습으로 국경을 넘어 상해로 먼저 잠임해 들어가서 활약함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가 상해에 가서 한 일은 받은 자금으로 불란서 조차지에 한국 임시정부 사무실을 임대하고 여러 지역에서 모여오는 독립운동가들을 영접하던 중 이광수와 더불어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한국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세계언론과 해외 한국인들에게 알리었다. 4월에는 사무실 총무로서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온 독립지사들의 모임에 사회를 보며 시베리아 한성정부와 연합하여 새로운 통합정부인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행정부와 의정원(입법부) 요원들을 선출하였다.
그는 상해주재 내무 외무 차장직에 있으면서 그 자리에 없는 장관들의 직을 대리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얼마후에 손정도 목사가 찾아오자 의정원 운영을 맡긴 것으로 안다. (이런 정보는 2005년 장광영 감독회장 시절, 정동교회 김대구 교회사 자료수집자가 미 로스엔젤레스 리틀 도꾜에 살고 있는 현순의 망내 아들 현다윗(당시 93세)을 만나 그로 부터 현순 목사의 자사(회고록)을 비롯하여 3.1운동,상해임정,워싱톤 구미위원회 경험의 실록 기타자료들을 20여권 입수하였고 현 다윗이 직접 한국에 방문하여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정동교회가 개척 설립한 몇몇 교회를 순방하며 강연하고 감독회의에 인사하고 여름 전국 평신도 지도자 집회때 특강 과정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승만 역시 미국에 있어 부재중이나 상해에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던 것이고 1920년 그의 여비지원으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해로 이승만이 거하던 워싱톤 구미위원회 사무실로는 그가 한국 임시정부 전권공사로 부임해 갔다. 그는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한국 임정의 승인과 한국의 독립국가 인정을 받으려 애써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승만이 상해에 정착 못하고 다시 미국 구미위원회로 돌아오면서 현순이 그 직에서 해임됨으로서 그동안 한국의 독립국 승인 받으려던 노력과 성과 또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리 된 주요 원인은 이승만이 상해에서 대통령으로써 성공적인 안착을 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긴급히 돌아온 데 있었으니 상해의 독립지사 임정요인들중에는 러시아나 중국의 자금지원을 받거나 정치적 연결이 있는 이들도 있어 미주에서 민주 교육을 받아온 이승만의 뜻을 일사불란하게 따라 줄 수 없었고 회의 때마다 불란이 일어나고 수습이 되지 않으므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상해 임정 이전의 방식으로 한국 한성정부의 대통령으로 한국독립운동을 하고자 한데 원인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현순이 있을 때 하와이 교민을 비롯 미국 교포들로부터 독립자금을 상해 임정으로 보냈었는데 이승만이 돌아오자 다시 그런 자금이 상해 임정으로 보내 질 수가 없었고 그런 자금은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여졌다.
상해 임정이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임정 사무실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초창기 현순 목사의 경호원격으로 일하던 청년 김구는 그 어려운 시절 임에 끝까지 남아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가운데 임정의 최고 지도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헤이그 밀사 이준, 정동교회 최병헌,현순, 손정도 목사 그리고 황해도 감리교 청년회장 김구등이 한국의 독립운동,상해 임정 결성, 대한민국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보게 된다.
대한 민국은 이승만 홀로 세운것이 아니고 3.1운동 이전부터 해온 독립운동의 결실로서 상해 임정을 거쳐 직접 깊은 관련이 없어도 그것들이 밑거름되어 대한 민국이 건립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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