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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하는 자와 멸시 받는자
관리자
- 2225
- 2015-03-10 19:28:53
창세기 16:1-14, 마태복음 27:11-19.
아브람과 사라 노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도록 자녀를 두지 못한 노부부는 아들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75세나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창 15:).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그 약속에 확신을 갖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은 여러 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창세기 12:2,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12:7,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15:4, “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15:13,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빨리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창 16:3).
그 후에 아브라함은 나이는 더 늙어가고 하나님의 약속은 더딤으로 자기의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몸종 애급의 여인 하갈의 몸을 빌려서 자녀를 얻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래는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고 기대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의 말대로 하여 아내 사래의 몸종 하갈의 몸에서 아들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의 의견에 따라 발전적이지 못한 의견을 듣고 행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몸종이었던 애급 여인 하갈은 잉태함을 알게 되자 그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습니다. 잉태하였으니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사람은 이렇게 사회적 지위가 갑자기 오르게 되면 교만과 오만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염려하였습니다.
젊은 몸종 하갈이 노주인 사래를 볼 때 늙고 연약한 노파, 자식도 없는 노파는 살아있는 송장에 불과 한 것으로 취급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분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생각하지 못 한다”는 말이 기억나게 합니다.
하갈이 교만해져서 여주인 사래를 멸시할 때 사래는 화가 나서 그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신앙의 광신자가 되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인본주의 신앙은 이처럼 멸시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시지만 인간들은 재주껏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시지만 인간은 수단과 방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성공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아내 사래의 불같은 항의를 받은 아브라함은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래는 몸종 하갈이었으나 아브라함에게 주었으므로 하갈에 대한 권한은 아브라함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승낙을 받은 사래는 다시 하갈을 구박하였을 때 하갈은 도망하여 광야에 나아가 “술”길 샘물 곁에서 방황하다가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사래의 여종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하였습니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천사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네가 잉태하였으니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하나님이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사래의 품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본래 족보도 오르지 못한 여자이며 별로 알려진 여자도 아니었으나 애급여자 이방의 여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아무런 혜택도 없는 여자였으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뽑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떤 존재로 남아 있었을 까요?
하갈과 같이 보잘 것도 없고 볼품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택하시고 뽑으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여주신 것입니다.
저주와 진노의 자리에 있어야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은 축복의 자리로 바꿔주셨습니다.
하갈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은 우리도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갈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져주십니다.
하갈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축복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에게 왜 가정적인 문제가 생겼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갈은 몸종이며 사래는 그의 여주인입니다.
사래는 늙었으나 그의 가정은 아내 된 사래가 지켜야 할 위치입니다.
그들의 가정적인 문제가 생겼으나 그들은 먼저 가정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스스로 지켰어야 했습니다.
사래는 자녀를 가지지 못하였어도 주인이요 하갈은 자녀를 가졌어도 역시 몸종입니다.
명령할 사람은 사래이며 명령을 받을 사람은 하갈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종이 바뀌어 멸시를 하고 멸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모든 가정의 노비들은 주인이 필요로 할 때 어떠한 봉사라도 자기 주인의 처분에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 나은 아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자식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고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여주인이 선천적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자 노비를 통하여 자녀를 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거나 죄악 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진 노비 앞에서 자녀를 가지지 못하는 비관적 생각과 남편의 총애를 하갈이 받게 되었다는 잘못된 관념이 교차되는 가운데 사라는 자기 위치를 포기할 뻔 하였던 것이며 하갈은 노비의 위치에서 아브라함의 첩이 되었다는 우월감이 그를 교만하게 하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망각한 여인들의 처사는 가정의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위에 탄 거지만큼 교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순종하고 충성해야 할 주인을 임신했다고 거역하고 무례한 행동을 할 때 악을 행하다가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정, 축복된 신앙의 가정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것을 생각하지 못한 교만이 자신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상하를 구별하지 못하고 주인을 멸시하고 상전을 거역하는 교만이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였습니다.
죄 없는 메시야를 죄 있는 인간이 재판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오히려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빌라도 총독이며 재판장은 예수님이 되셔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말없이 그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서 예수님을 상관하지 말라는 충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백성들의 탄원소리에 밀려서 무책임한 재판을 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경솔함은 그를 총독자리에서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떤 문서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한답시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재판한 뒤에 곧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와 진리의 말씀을 알려 주십니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기 자기가 지켜야 할 위치가 있습니다.
종에게 아무리 큰 공이 있다 할지라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큰 공을 내 세워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의 위치를 넘겨보는 것은 화를 거둘 뿐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 나아갈 때 화합과 전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지 못하고 분별없이 살게 될 때에 거기에서 문제는 시작됩니다.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어리석은 생각을 갖게 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여 보려고 할 때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의 위치는 주인이며 하갈의 위치는 종의 신분입니다.
서로가 그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주인의 위치를 넘겨보려고 할 때 주인 사라의 화를 불러 일으켰고 하갈은 광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잘 지켜 나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갈은 잉태한 후에 사라는 다시 종의 신분으로 환원시켜 더 이상 아브라함의 첩이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교만은 오히려 자기를 몰락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각자가 믿음을 지키지 못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에서는 다른 가정들보다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할 가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에 있어야 할 것들과 필요한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더욱 사랑하셔서 그를 우상과 죄악들이 우글거리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의 가정에 자녀가 없음을 이미 알고계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의 복을 주실 것을 여러 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끝까지 간직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에도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땅을 나누어 가진 뒤에도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루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께서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다소 항변하는 어조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과 약속하셨습니다.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런 약속과 다짐이 계속되었으나 아브라함과 사래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어서 아들을 가져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기르는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통하여 후손의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몸에서 나은 아들로 후손을 삼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방 여자 몸종인 하갈의 몸을 빌려서 아들을 가져 보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 질까 조심하라”는 엄숙한 경고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최악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는 진실어린 충고의 말을 실감 있게 듣게 됩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온지 10년이 지나서 입니다.
그는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며 또한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였고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미쁘신 분이시며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실한 자가 되도록 하셨음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체험 속에 안일해졌을 때에 유혹받아 타락하게 됩니다. 그것은 옛 뱀 곧 마귀의 특징인 교활함으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사탄은 선악과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신하게 함으로 인간을 타락케 하였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러한 제안은 사라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아브라함은 그 말을 받아들였을 때 그 마음과 태도는 육적인 욕망에 탐닉한 죄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과 같이 우울증으로 단순하게 부당한 탐욕의 난폭한 기질로 비롯되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의 믿음은 사랑하는 아내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단일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날마다 더욱 분명히 나타나지 않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계획적으로 조장되어 사래의 제안으로 모든 사람이 생각하였던 육적이며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정에 불행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믿음의 높은 단계에 이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내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별다름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사라의 인간적인 방법에 따랐던 아브라함에게까지도 이 범죄의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이집트 후손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이스라엘 후손 간에 수 천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하게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3. 그들은 책임을 자신이 지려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라는 몸종이었던 하갈에게 멸시를 받게 되자 남편 아브라함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배은망덕한 하갈의 소위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였을 것입니다.
존경하고 충성해야 할 주인에게 오히려 거역하고 무례한 행동을 할 때 견딜 수 없는 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라는 그런 일을 자기의 계획으로 진행하고서도 자기의 실수와 잘못을 남편에게 원망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흔히 자신의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속아 죄를 범했던 아담과 하와도 그들의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에게 그 책임을 지웠고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지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의 책임은 자신이 질 줄을 아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려 했는데 너는 저렇게 했으니 그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는 식의 핑계는 그리스도인들의 솔직한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핑계와 원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실수와 죄를 지을 뿐입니다.
아내의 원망을 듣게 된 아브라함은 “그대의 여종은 그대로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래와 하갈의 사이에 화해의 일을 하지 않고 두 여자 사이의 일을 사라의 책임 하에 맡겨버립니다.
아무리 가정의 일이 아브라함의 뜻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책임은 가정의 가장이 되는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며 해결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직접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공동의 책임을 질 줄을 아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어떤 나그네가 강도들을 만나 짐들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반 죽게 되어 신음하고 있을 때 그곳으로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외면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고, 또 강도들의 협력자도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무책임하게 강도 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간 행위는 예수님께서도 간접적으로 비난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죽어가는 나그네를 도왔을 때에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라의 학대를 받은 하갈은 광야에 나아가 술 샘 곁에서 방황하다가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천사의 이러한 질문은 하갈이 어디서 온 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이미 천사는 하갈이 사래의 여종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의 이러한 질문은 하갈에게 대하여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나무 뒤에 숨은 아담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천사의 질문에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주인에게 저지른 경거망동의 행위는 생각지 않고 주인 사라가 자기를 못살게 굴었다는 원망의 말인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심는 대로 거두게 됩니다.
하갈은 주인을 멸시하다가 더 큰 멸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화를 심으면 화를 거두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있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헤롯왕은 사람들로 부터 영광을 스스로 취하다가 그의 창자를 벌레가 먹으므로 죽었다고 합니다(행 12:23).
우리는 주인을 떠난 하갈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 다른 것들을 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하갈은 주인이 품을 떠났을 때 집도 없었습니다.
먹을 식물도 없었고 고독하였고 슬픔뿐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갈 곳도 없는 외로운 자가 될 뿐입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하고 질문했습니다.
하갈은 그 때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갈 곳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갈 곳을 알고 갈 곳이 정해져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살아서 보고 왔노라고 그의 서신 가운데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서로 망하는 일입니다.
용서도 사랑도 없이 사는 것은 결국 패망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잘 분간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