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7말씀

관리자
  • 2225
  • 2015-03-31 21:15:45
십자가 위의 7말씀
시편 22:1-13, 마태복음 27:45-56.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의 미움과 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죽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서도 부끄러움을 고통과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말씀하신 7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 1성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죄도 허물도 없으시면 서도 자신에게 너무나 혹독하게 저지르는 악행 자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눅 23:34).
자기를 희롱하고 모욕한 뒤에 죽이기 위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올라가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도 두 발에 쇠못을 박고 의복들은 모두 벗겨버리고 제비로 나누어 가지며 통쾌하게 웃으며 자만에 차있는 로마 군인들과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활은 정신적 도덕적 무지와 무식 속에 살면서도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데는 기술이 능수능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능란하고 전문적인 사람은 오히려 영으로 취급되고 높여지면서도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심령으로 부터 끌어 오르는 분노와 저주를 죽이고 사랑으로 대하시는 기도가 있었기에 인간의 손에서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이 땅에서 우리는 지금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제 2성은 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종각에도 세우고 제단에도 놓아 그 모양을 상징으로 존숭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신십자가는 험하고 볼꼴사나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들은 참혹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로마 자유민에게는 사용하지 않고 노예와 식민지의 사람이나 악한범죄자들에게 극형을 치를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과 두 강도들 사이에 되어 진 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 두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달려있는 십자가상에서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군인들을 악담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천 받던 타락자가 천국에 있었습니다. 연유를 물으니 자기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죽어 가는데 어느새 마귀의 부하들이 와서 자기를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내려와 자기의 영혼을 구해줄 연구를 하다가 자기가 최후로 흘린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자기의 눈썹에 달린 것을 보고 천국으로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제 3성은 효성의 부탁이었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의 처형을 겹겹이 둘러서서 바라보며 구경하는 원수들의 사이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통분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요 19:26)하고 문안을 드렸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육정을 깨닫고 문안하는 예수님의 효성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총에 맞아 죽어갈 때는 “어머니”라고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장성한 아들이 되었으나 어머니 품에 안겨 죽고자하는 절규의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들을 위해서 우는 마리아를 위로하며 슬퍼할 때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부탁하십니다. 죽은 후에 어머니를 생각해서 입니다.

요한을 택한 것은 사촌이라서가 아니라 충성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신도들 간의 친교가 혈연관계보다 더 가깝습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 무엇보다도 중합니다.
단 한분밖에 없는 어머니를 두고 가는 예수님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죽음의 고통과 공포에서도 효도하는데 심혈을 다하였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효도에 있다면 사회의 질서 또한 효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보다도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보다도 부모님을 먼저 위하고 자기의 생명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위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제 4성은 육체의 기갈이었습니다.
세상은 육체의 기갈에서 몸부림치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사랑의 기갈에 목말라 부르짖는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가하면 생명의 말씀의 기갈에 안식을 찾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말씀은 우리들 각 사람의 벌거벗은 생생한 모습들이 아닙니까? 지금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사랑과 인정의 기갈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던 주님 앞에 영생수를 찾으려고 오는 자들이 사랑의 물이 말라 버린 모습의 갈증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목마름과 주지 못하는 목마름입니다.
교회는 있으나 사랑은 없고, 십자가는 있으되 희생이 없으며, 찬송은 불러도 기쁨이 없고, 기도는 하지만 믿음의 행위에서 떠난 현실 앞에 목이 마른 것입니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고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며, 주어도 외면당하는 사랑의 결핍들이 인생들을 목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생활은 24시간 희생과 봉사가 따라야 합니다.
기독교는 가장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종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의 하나요 몸과 정신으로 우리와 연결을 맺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위의 제 5성은 고통의 절규였습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에게 배반당하는 마음의 고통. 온 몸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육체의 고통, 죄 없이 처형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조롱과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멸시받는 고통, 그보다도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영혼의 고통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원이 다른 최악의 저주이며 고통이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저주를 도맡아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절규의 몸부림입니다.

버림받은 아픔, 배신당하는 괴로움의 부르짖음은 “낙망의 신조에서 나온 부르짖음”이라고 스토크는 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 당황, 의심도 나누셨습니다.
그의 겟세마네의 고통과 고민은 마음과 영혼의 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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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이 더하면 더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더욱 깊었습니다. 사람들은 환란 때에 주를 버리고 도망간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시며 사람들은 다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환란이나 시험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 수 있으랴?

십자가 위에 제 6성은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들과 싸워서 이기고도 왕후에게 쫓겨 브엘세바 광야에 이르러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 19:4)하고 탄원하였으나, 두 강도들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다 이루었도다.”(요 19:30)고 소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악에 대하여 선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불의에 대하여 의로 승리하셨습니다.
증오와 미움을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자세와 승리의 신념은 그에게 안정의 태도를 주었습니다. 법정을 7번이나 안 밖을 돌고난 빌라도는 마치 정신 나간 자 같았으나 그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침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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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유스도 앞에 묶여 재판을 받았으나 자유인이었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으나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 그는 육신이 묶여 있어도 심령은 자유를 얻은 자들입니다.

십자가 위의 제 7성은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중국의 진시 왕은 죽기가 싫어서 동남동녀 3백인을 모아서 불사약을 구해 오라고 보내었고, 로마의 폭군 네로는 죽음이 두려워 젊어서 버렸던 여인의 치마 자락에 매달렸으며, 하나님께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죽음을 부탁하는 신앙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죽음입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는 버림받은 존재이면서도 불구하고 자기를 철저히 위탁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품에서 위안을 받아야 할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그곳은 모든 무신론자나 희의론자나 향락주의자나 이단자나 광신자도 다 돌아가야 할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떠나는 자나 갈 곳을 몰라 방황하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기도에서 갈 곳을 찾아 발견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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