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마태복음 16:21-23)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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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1 20:10:36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이어서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로서 당할 고난을 예고하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예고는 마가복음 8:31-33과 누가복음 9:22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이 기사를 【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로 시작한다.
[이때로부터]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때(16:13-20)부터’를 의미한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가를 밝히실 필요를 느끼신 것 같다.
[장로]는 15:2의 주석을 보라.
여기의 장로들은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인 일반인, 즉 평민 출신으로서 산헤드린(공회)의 일원이었다.
[대제사장들]은 가야바와 그의 장인이자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대제사장의 가족까지 포함한다.
[서기관들]은 2:4의 주석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라고 하신 예고는, 제자들에게 믿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것이다.
16:22-23과 {마가복음 8:32-33을 보게 되면, “그 모든 정설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고백은 귀신들의 예수 이해(막 3:11, 5:7)보다 더 나은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E. Schweizer).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직후에,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긴급한 일이라고 여기셨던 것이다(W. L. Lane, W. Hendriksen). 또한, 지금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서 제자들도 그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도록 준비시키려고 하셨던 것이다(J. Calvin).
고울드(E. P. Gould)는 “인자가 고난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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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에 기인하고,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영적 본질, 즉 힘에 힘으로 대항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에 기인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다[사 52:13-53:12].”라고 설명하였다.}(막 8:31의 주석).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는 필연성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 52:13-53:12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에 대한 탈굼 역을 볼 때,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고난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알 수 있다. 탈굼 역을 보면, 고난받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메시아에 관해서는 다른 말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의해 처음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받게 된다는 사상이 발전되었다는 견해는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W. W. Wessel). 크랜필드(Cranfield)는 예수님 이전에도 고난받는 메시아 사상이 유대주의 안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희귀한 이유는 당시의 반 기독교적 논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막 8:31의 주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언은,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예언을 동반하고 있다.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 완전한 죽음과 장사지낸 후의 사건이라는 점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후에 그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막 16:10-11, 눅 24:11)을 보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메시아관과 다른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비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예고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거리끼는 것이었다(고전 1:23).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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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베드로가 감히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가로되]는 에피티만(ἐπιτιμάν)이며 ‘논박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자라고 책망하거나 비난하다’를 의미한다. 이 베드로의 망발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은 결과이다.
[주여](퀴리에, κύριε: 1:22의 주석을 보라.)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만류한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류하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이며 단호한 반응에 대해, 마태는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가 마가복음 8:33에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로 되어, 예수께서 제자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여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은 동시에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틈타 교묘하게 이용한 사단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 사실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휴파게, Ὕπαγε)라고 하신 명령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사단에게 명하셨던 말씀(4:10)과 같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의 원문(σκανδαλόν εἶ ἐμού)을 직역하면 ‘너는 내게 함정이다.’이다(5:29의 주석을 보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고난의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셔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의 일]은 예수께서 그 고난의 길을 피하고 유대의 왕이 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따라서 제자들은 그를 보좌하는 대신들이 되어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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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일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이용된 주된 원인이고, 책망을 받은 주된 이유이다.
얼른 생각하면,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논박이 인정이나 의리 또는 존경하는 이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 같으나, 실은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적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들은, 그분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466-469.>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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