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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민비(閔妃) 당시, 요녀(妖女)가 세도 부렸다.
이주익
- 3821
- 2015-04-14 20:09:35
민비(閔妃) 당시에 무녀 복술배(巫女 卜術輩)가 궐내(闕內)에 운집하여 황상(皇上)의 총명을 가리고 제반 음사(陰邪)가 자의자행하였다. 당시에 관성제(關聖帝)의 신(神)을 접(接)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요녀(妖女)가 있었다.
그녀는 궐내에 들어와 우선 민비를 유혹하고 황상에게까지 친대(親待)하여 요언망사(妖言妄辭)로 애걸(哀乞)하여 마침내는 황상이 국재(國財)를 지불하여 동소문(東小門) 송동(宋洞) 일대지(동대문 밖 밤나무 골)에 관성제를 위하는 북묘(北廟)와 광대한 주가(住家)까지 건축하고 진현보군(鎭顯寶君) 이름까지 얻었다.
그녀가 당시에 어찌 세도(勢道)를 하였던지 남북촌 고관대작들이 송동으로 모여들어 이 요녀와 교유(交遊)키를 원하며 부잡(扶雜)스런 계획과 청촉(請囑)들을 일삼았다.
부친께서도 그녀와 교연(交緣)이 있었고 등사(登仕)의 폐조(幣助)도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녀의 양자(養子) 김창열의 장녀로 나와 정혼하고 정해년(丁亥年,1887년)에 결혼을 독촉하였다. 그때 나는 9세의 소아(小兒)였다.
“그녀가 방금 무상(無上)의 세도를 하나 후일 혁신당에게 몰리는 날에는 연누(連累)의 화(禍)를 면치 못하리라”하신 조모(祖母)의 고견(高見)으로 부친을 권유하여 청운의 뜻을 벗어버리고 항동(杭洞)으로 전가(全家)가 내려갔었다. 항동으로 말하면 고조, 증조, 조부의 유해(遺骸)를 모신 선영지(先塋地)이다.
* 위 글은 애국지사 현순(1880년-1968년) 자사(自史)에서 발취한 비사(祕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