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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감리교회 모습은 오늘 신학대학의 학풍에서
현종서
- 2552
- 2015-04-12 17:50:24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때 비로서 진짜 기독인들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후 한국교회의 특색이 들어났고 초교파적인 협력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이 자연스러이 일어났었다.
하디는 누구인가? 무디의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선교운동에 감동받아 선교사로 지원해 나온 자였고 성경을 읽으며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였다.
한국에 선교하도록 비젼과 물질로 지원한 가우처 박사는 에즈베리의 전도와 민주 정신에 더하여 세계선교의 비젼, 그중에도 교육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려한 인물이었다. 그의 꿈이 메클레이를 통해 중국과 일본에 아펜젤러 스크랜톤 모자를 통해 한국에 그 비젼의 씨를 뿌렸고, 한국에 기독교정신 문화가 보급되면서 삼일운동 상해 임시정부 후일 대한민국이 건립되었다.
한국에 기독교 토착화운동은 이미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던중 문화의 핵이라보는 종교를 연구하며 그 종교의 영향속에 있는 한국민들까지 구원하고자 한 것이 감신의 타 종교 연구로서의 타종교와의 대화였다고 본다.
감리교회 조직신학자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웨슬리는 체계적인 신학이 없었기에 그의 기본정신이 웨슬리와 비슷하여 감리교회적인 조직신학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써 신학훈련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윤성범은 칼바르트에 머물고자 한 것이 아니고 한국유교에 직접 대화에 들어갔으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웨슬리 신학을 권하였었다. 그러다가 변선환에 이르러 웨슬리 신학대신 유신론적 실존 철학에서 무신론적 실존철학(불교)으로 발전해 감으로 기독교적인, 그리고 감리교회적인 가르침에서 거리를 벌려놓게 되었던 것이다.
후학들은 변박사의 학문을 잇겠다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된다고 믿는 한국 감리교회의 부흥사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을 교권주의자라 비난하며 성경원리에서 멀어져 가는 종교철학을 할 것이 아니라 그의 미완성적 불교도 구원철학을 실효적인 불교도 구원신학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폴 틸리히의 철학과의 대화의 신학은 홍현설 학장 생존시 틸리히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비윤리적인 삶이 알려지면서 그의 신학에 대해서도 큰 실망감을 표한 적이 있으셨다. 신앙고백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인 삶이 뒷받침이 되지 못한 신학은 그 가치가 떨어진다 보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적 분별력을 잃은 이성적 학문 역시 신학으로서의 학문의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보수주의 신학자(메이첸등)는 그래서 독일의 성서고등비평 자체를 타부시 한다. 그는 독일에 유학을 하였다가 중단하고 돌아와 성경의 계시속에 나타난 계약신학 연구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성경벌레라 불리웠던 웨슬리가 성경역사비평학을 달갑게 생각할 것인가? 성경비평학은 성령의 감동이나 기도를 모르는 불신앙인도 할 수 있는 인문과학적인 한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 신앙인의 학문인 신학에 필수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3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독일 이나 미국이나 영국 신학의 장점과 단점을 잘 살피어 한국 현실에 보다 이해되고 실한 결실을 가져 올 수 있는 성경원리와 체험이 어울어지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타종교인을 설복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확장시켜갈 수 있는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서구에서 극복 못한 성경역사비평학을, 우리 감신성경학자들이 넘어서고 다원주의 종교사상을 우리 감신 교수들이 넘어설 때 셰계 신학계의 리더로 밭돋음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기독교신학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학문이지 그리스도를 종으로 삼는 학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