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정의의 심각한 미스매치

이재신
  • 2524
  • 2015-04-22 07:03:35
은혜와 정의의 심각한 미스매치

1988년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과학원에서 실시한 실험을 두고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과학실험이라고 부른단다.
이름하여 투 슬릿실험인데, 내용인 즉 전자총을 통해서 발사된 전자가 분명히 입자임에도 불구하고 물결처럼 파동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 과학자들이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관찰하려고 하거나 카메라를 설치해서 분석해 보려고 하면 전자는 그냥 입자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자 효과라고 하는데 그만큼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 실험이었다.
양자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하이젠 베르크에 의하면 원자(물질의 최소단위)도 물질이 아닌 경향이라고 해서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개념을 당황케 한다.
우리가 보통 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물질적이며 고로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개념, 생각,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를 포함한 우리의 의식이나 생각이 헛되지 않으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고로 21세기인 이제는 과학과 종교가 만나야 할 시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이 기여한 바는 무한한 정신세계(종교의 자리?)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학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고전 물리학(소위 뉴턴의 물리학이라고도 함)에 착안해서 보던 고정된 세계관이나 데카르트가 교회는 정신세계를 다루고 과학은 보이는 세계를 다룬다는 이원론이나 다윈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길을 아무 원칙도 없이 진행시켜 나가는 DNA의 무작위적 활동이라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다른 세계관과 우주관을 확립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과학이 만들어 주는 신앙의 자리가 확보?된 셈이다. (그것도 착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세의 교회는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에 대해서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해서 큰 우를 범한 것이 우리가 얻은 교훈이니만큼 지금도 억지가 아닌 바른 해석과 적용이 필요할 듯)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교회가 여러 문제들에 봉착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없다.
아전인수식 태도나 시대착오적인 교회의 안일과 오류로 인하여 중요한 때에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이단사상과 타종교에 그 자리를 내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은혜는 정의의 차원을 넘는 개념일테다.
즉 옳고 그름을 뛰어넘어 얼마나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느냐를 두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은혜이건만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상식적 차원의 정의의 개념조차도 확보하지 못한듯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별 대단치도 않은 문제를 갖고도 세상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서슴지 않고 스스로 단절을 자초하고 있으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독 선거를 두고 벌이는 세상법정 다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세금의 문제나 종북(사상)의 문제나 동성애의 문제 등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각을 세우고, 오히려 세습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세상의 시선을 적당히 피해보려는 듯한 딱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인간 복제나 세부모의 문제, 안락사의 문제 등 그동안 인류가 격어보지 못한 문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천주교는 일관된 입장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개신교는 너무 복잡한 양상이다.
진보와 보수, 기득권과 비기득권,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 등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으니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초교파적 기구가 있어서 통일된 입장을 조율하고 정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최신 심리학에 의하면 대부분의 옳고 그름의 논쟁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은혜나 사랑없는 감정의 포장이 이성이며, 선한 감정 즉 감정의 순기능을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할례의 문제나 율법의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다시피 당시에도 맹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그는 유대와 이방의 경계를 뛰어넘었으며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그 당시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평등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애쓴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 않는가?
교회나 교단 내에서 얄팍한 꼼수가 판을 치며 은혜는 뒷전이고 오직 정치력?만을 앞세워서 입신양명(표현이 좀 웃기지만)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면 그러한 소탐대실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누가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겠는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정의라면 은혜는 그 차원을 넘어 거룩한 희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그런 길이라면 누구라도 결과에 상관없이 동참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현대사회에서 정의란 판에 박은 것 같은 고정개념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허면 방황하는 세상을 상대로 질 떨어지는 다툼이나 논쟁 대신 올바로 인도할 최고의 방책(그것은 곧 사랑과 은혜일 터)을 제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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