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존경하는 이주익목사님.
민관기
- 3318
- 2015-06-26 22:08:46
2. 아펜젤러의 암살 가능성을 시사하셧습니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 아펜은 85년 4월 5일 입제물포하여 한양으로 입경하지 못햇고 다시 왜로 도왜햇다.
*. 란돈 입조선 입경하다. 란돈 입경후 아펜부부와 란돈 모 입제물포 아펜 거주지 없어 입경못하고 란돈 모만 입경하다.
자~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 당시 제물포 노역꾼 조선인 하나도 없엇다. 오로지 대불호텔에만 왜인과 머물럿다. 하니, 내리교회가 아펜 입제물포 자신들 교회 설립일로 삼음은 전혀 아니다. 아펜은 왜주재시 몇 명의 조선인 만낫을 뿐이다.
*. 후에 란돈 준비로 아펜 입경 정동 자리 선교 준비 햇다. 선교 허가가 구체적이지 않아 처음 선교윤허 조건대로 조선에 대한 근대지식 배움 전함으로 사역 시작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아펜이 두번째로 내조선시 동행한 왜인. 입경후 86년 수세 3인인 란돈의 딸 마리안 그리고 자신 딸 앨리스와 하야가와 데츠야.
*. 하야가와 데츠야는 왜공사관의 참사 자격입국. 왜에서 내조선시 항시 아펜과 함께. 아펜의 한양 거주지 없어 대불호텔 거주시에도 항시 옆에 잇음 = 이 때 데츠야와 아펜 어떤 관계 설정 되엇을까?
한편 아펜은 조선인은 대면도 못해본 상황.
*. 아펜은 재팬 모라고하는? 잡지 한국 특파원 된다. 정기적 기고 잇엇다.
*. ??? 아펜은 선진화되엇다고 처음 느꼇던 왜 정보원이다. 본국인 미 시절 [은둔의 나라 한국]이란 문서를 통해 조선은 미개햇단 선입견 가졋고 갑신정변으로 왜 망명중이던 박영호, 김옥균, 서재필통해 조선 학습하며 다시금 자신들의 제도나 교육 등이 선진적이다란 생각을 가지게 되기도 햇으나, 신사유람단 일원 왜 유학하던 이수정이 우리말 이두어로 성경 번역해둔 사실에선 놀라움도 금치 못햇다.
*. 이 후 배재 설립후 왜에서 만낫던 서재필을 배재교사로 초빙하고 그가 설립한 독립협회의 요인들을 보호하고 독립신문의 발행인도 맡으며 독립문 건립시 기도도하도 신문에 군주제와 공화제의 차이도 보도한다. 이 글을 수 만명이 읽엇고 배재 주시경이 편집햇다.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정리해보자.
1. 아펜은 조선은 미개하다. 하니, 미식으로 개조 필요하다. 배재 설립, 종합대학 설립과 신학교 설립, 재팬무슨 잡지 조선특파원 = 일본 우위, 독립신문 공화제 보도 = 사실상의 역적 모의일 수 잇다, 광무황제 호위, 춘생문사건 관여, 급격한 조선 사회 변화위한 그의 노력과 함께..
2. 아~ 조선인은 미개는 아니구나 깨달앗다. 다만 늦게..
3. 왜에 도착 왜가 선진인줄 알앗고 내조선시 항시 함께 햇던 왜 참사관 [데츠야]로 부터 근 30 여일간의 친왜 밀봉 교육을 받앗던 아펜. 왜 정보원 취임 허락이나 밀약.
3. 데츠야에 대한 언더우드(보좌)와 공동 세례.
4. 조선인의 종교적 문화적 사상적 우수성 뒤늦게 깨닫다. 왜 정보원에서 친조선으로 전향. 노심초사, 전전긍긍, 안절부절..
조상이 스위스의 장로교 계통에서 미주로 이주해와 감리교로 개종한 후 부친의 원조를 받지 못한 아펜.
내조선 선교사 부임 후 부친에게 절절한 맘으로 서신하나 번번히 거절 = 배재 건설시 부친 도움 전무.
5. 하여, 일찍 그리도 늙엇나? 조선인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해졋나? 아무튼 그는 친왜에서 친한으로 전향을 하엿다.
아마도, 이것이 아펜젤로를 제거해야 겟다는 왜의 결정 아니엇을 까요?
이주익 목사님.
한 나라 왕비도 궁궐 침입 시해하는 왜인들이 무얼 못하겠습니까?
&&. 확인된 건 아니지만 아펜이 조선에서 첨으로 베푼 세례자의 이름과 태평양전쟁시 하와이 섬 꼭대기에 올라 공습해오는 왜공습기에 뚜따~뚜따~치며 선박들의 위치를 날려준 이의 이름도 [하야가와 데츠와]이며 그는 당시 하와이 왜의 영사직이엇답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