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의 복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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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27 01:40:10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창세기 50:15-21, 마태복음 5:9.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 곳곳마다 여러 지역에서는 피 흘리는 살육의 전쟁과 혼란이 계속되어져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정과 평화를 그렇게도 원하고 갈망하지만 30년을 채우지 못하고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의 피로 이 땅을 물들여 왔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평화를 위한 회의들을 계속적으로 열고 있으며 국제 연맹이나 U.N도 모였다 하면,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켜 보려고 지혜를 모으고 연구를 해보지만,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평화는 머물지 않고 테러와 폭력과 분쟁과 전쟁만 계속 되어질 뿐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도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쓰는데도 왜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정치적 인 이유도 아니고 경제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종교적인 이유도 아니고, 신학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이 땅에 평화가 절대로 정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노력을 해보아도 평화를 성취하겠다는 것은 모두 허구이며 허상일 뿐입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고 근본적인 치유도 있어야 하겠지만, 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만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값싼 논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결코 평화는 정착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의 성품은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식의 생활태도도 아닙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태도도 아닙니다.
그런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은 겉으로는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참 평화를 위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이란 무엇입니까?
화평이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ēnē)이고,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ōm) 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의 화평이란 말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언제나 인간의 최고의 선을 이루는 데 공헌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노력하고 그룹과 그룹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국가와 국가 사이의 화평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소극적인 불화를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소간에 적극적으로 평화를 성취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6번째로 복 받을 사람에 대한 설교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지만, 7번째의 복은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신분에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의 주인이며, 화평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평화는 죄와 접촉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악한 것과 연합하여도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적하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나 자신을 의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사람을 “화평을 만드는 자”라고 말합니다.
축복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화평을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화목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이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표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하나님의 특성인 화평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특성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평화를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5:33,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베들레헴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합창소리는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하는 아름다운 찬송이었습니다.
이 찬송소리는, 화평의 주인 되시는 메시아의 탄생을 경축하는 노래였고, 예수님은 위대한 평화의 창조자 되심을 알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천국 복음을 증거 하시던 예수님은 아무잘못도 허물도 없이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매수 당한 군병들은 희롱하고 매로 치고 멸시를 하다가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끌고 가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괴롭히고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비웃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자기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화평을 만드셨기에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그와 같은 스승의 예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진실로 메시아에게 속하여 있다면 메시아 적인 평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화평케 하는 자가 최상의 화평을 이루는 자이지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재치와 지혜와 용기와 사랑이 필요하며, 그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합당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나 어떤 기관에서도 참된 평화를 만들 수 없으며 일곱째의 지복,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정이 화평해야 만사가 형통 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집단이나 기관이든지 화목하면 힘이 있으므로 일이 잘 풀립니다.
화목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일이 잘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이 왜 좋은 나라입니까?
고린도전서 13:13, 보면 천국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국에도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없는 것들은, 어두움과, 두려움과, 분쟁과, 미움과, 시기와, 저주와, 싸움과, 전쟁이 없습니다.
천국은, 이별도, 눈물도, 질병도, 죽음도, 없습니다.
고민도, 고통도, 아픔도, 한숨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이해하고 협력하며 하나님의 빛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서로 다투고 끊임없이 전쟁하며 불화 하는 곳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늙은 부모님께 효도를 한다고 부모님께 좋은 아파트를 사서 여러 가지 문화시설을 갖추고 냉장고에는 온갖 먹을 것들을 가득 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의처증이 있는 분이었고 할머니는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못하는 수다쟁이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은 날마다 싸우고 다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가정은 가정 천국이 아니라 가정 지옥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노년에 할아버지와 헤어져야겠다고 가정을 뛰쳐나갔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할머니를 의심하여 죽인다고 따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그러므로 다투며 싸우는 곳은 지옥이며 서로 사랑하며 화평한 곳은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위장병이나 내장에 어떤 질병이 많이 걸리는 확률은 대개 마음이 몹시 상했다던가 신경을 쓰고 고민하는 가운데 식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불안한 가운데 식사를 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나무를 씹는 것 같고 모래를 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해도 속이 편하지 않고 소화가 될 리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불안한데서 식사를 하고 소화가 되지 않으니 위암이나 장암에 걸리기 쉽습니다.
잠언 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지 못하여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잠언 25:2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잠언 27:15-16,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 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천국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염려를 잊고 사랑하며 살도록 노력합시다.

왜 불화 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불화 하게 되는 첫째 이유는,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불화 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물리 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도, 아내 사라와 첩, 하갈의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자 아브라함의 가정은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아내들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불화 할 때, 그 가정은 늘 다투고 불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불화 하게 되는 둘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짖는 셋째 이유는,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나 개인과 어떤 단체의 사이에서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나 불화 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오염시켜 보이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고 혼란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이기심과 욕심을 품게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빼앗아 버리고 두려움과 불안을 줍니다.
잠언 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인생을 설계할 때 평안의 반석 위에 인생의 삶을 건축해야 혼란과 시련의 창수와 폭우가 쏟아져도 안전하지만 불안과 초조의 모래 위에 건축을 하는 삶은 곧 무너지고 파손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혈의 피로 모든 죄를 다 씻어 버리고 참 평안을 지니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불화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불레셋을 이기고 올 때 여자들이 소고 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 만”이라고 노래하며 환영합니다.
자기에게는 천 천을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 만을 돌리는 노래에 불만한 사울을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
“교만에서는 다툼이 일어날 뿐이라”(잠 13:10) 했습니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북한을 미국은 테러국으로 지정했습니다.
북한은 끊임없이 전쟁 준비와 테러로 세계를 긴장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은 세계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힘든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고 국제적인 고립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2천년이 되면서 북한은 테러국에서 오명을 벗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할 때 불화 하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꿈을 꾸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신들이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말에 요셉을 처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을 때 곡식을 사러 찾아와 절하는 형들을 보고 알아보았으나 형들의 허물과 죄의 원한을 용서하고 오히려 잘 대접했습니다.
그럴 때 그의 가문과 가정은 화평을 이루어 야곱이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아니 요셉이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화평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 시 우라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 위에 놓으리라”
그러나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불화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더 크고 악랄한 일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인격에 치명적인 모욕의 말도 달게 받으면 불화를 그치게 되지만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말도 감정이 상하고 인격에 손상 받으면 불화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죄도 흠도 없으면서도 원수들에게 희롱 당하고 조롱 받으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거하거나 대꾸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중들처럼 죄악세상을 떠나 자신만 도를 닦고 주변의 세속적 사악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세상을 보다 나은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화평이란 국가에 있어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이고 형제애를 위해서도 사회에서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평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화평을 만드는 과정은 위험스럽고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화평은 투쟁하는 당사자들에 의해서 공동의 적으로 간주되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평의 대가는 대단히 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 칭호는 화평케 하는 자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보상의 타당성은 그 같은 일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에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은 평화 애호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 대라 누가 송사 하여 네게 속옷을 달라 하거든 겉옷도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도 동행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 생각하고 오래 참고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의 대화도 평화스러웠습니다.
화해적이고 양보적이었습니다.
진리와 의외에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평화는 화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화목케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화평케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생활에서 성공을 이룩하게 하는 양보와 인내입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평과 비난과 허물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대꾸하려는 유혹을 받아도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평자는 말하고자 하는 것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듣기는 속히 하고 노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잠언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야고보서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했고, 야고보서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각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한 것처럼 화평을 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아와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신경질적이거나 신경 과민이 되어도 안됩니다.
화를 잘 내어도 안됩니다.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도에 어느 은퇴한 복싱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지난 과거의 퇴폐 된 삶을 고쳤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느 사람이 그의 얼굴에 컵의 물을 부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쏟아진 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말없이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웃으며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자 물을 끼얹은 사람이 그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의 미소와 인내는 오히려 그를 더욱 두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수세를 취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 돼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복음의 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추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이루는 삶은 하나님을 닮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어느 한편에만 속하면 그는 벌써 편 당을 짖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립을 지키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해 U.N은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어느 나라에든지 치우치면 이미 평화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한 것은 그가 평화의 왕으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바라보면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가 오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심은 그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평화를 이루셨습니까?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피로서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고 죄와 악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시게 하시려고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받을 복은 어떤 것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먼저 스스로 행복합니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관대해서 자기 스스로 최대의 행복을 누리며 가정에서도 행복하고 사회에서도 화평을 만들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있는 그곳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평이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게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온 인류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보다도 이 땅에 화평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화평 등을 이룩해야 합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이 가장 깊고 성스러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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