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평가(評價)

함창석
  • 1297
  • 2015-10-18 22:13:38
신학대학평가(神學大學評價)

오늘날 신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학문과 삶, 삶과 학문의 경계선에 서 있으며 두 세계가 공동체 구성원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있는 현실입니다.

평가는 사람이나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일정한 기준에 의해 따져 매김이나 그 가치나 수준이며 대학은 자유로운 공기(분위기)와 낭만 속에서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폭넓은 교양과 전공학문을 공부하고, 인격을 닦고 친구를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인생과 세상을 담론하는 곳이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는 학문 탐구하고 교육을 통한 학문(지식)의 전수이나 오늘날에는 취업준비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의문을 품고 그것을 풀기 위해 사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많은 문제에 대해 사색, 의문을 품고, 회답을 추구하기에 탐구의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학문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학문(學問)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힘이나 그런 지식을 일컫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한자의 보급과 학문이 발달했으며 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생겨났습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설립하여 귀족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백제도 5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등의 박사제도를 통하여 유학교육 기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 순수비에 나라에 충성을 드높이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나오며, 임신서기석에도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경전을 공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는 중국의 한문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쓰였으나 우리말과 달라 불편함이 있자 고구려에서는 한자의 음이나 뜻을 따서 우리말을 나타내는 표현을 발견했고, 신라의 설총(薛聰)은 이를 발전시켜 ‘이두’를 만들어냈습니다. 삼국시대는 문자의 발전으로 가요와 설화 같은 문학 또한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지성사에 중심이 된 신학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한 학문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방법론을 수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생각은 17세기에도 계승된다. 보에티우스(Voetius)는 ‘신학은 학문의 왕 일뿐 아니라 모든 학문은 신학에 봉사할 때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이런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의의를 제기한 이는 라무스(Peter Ramus, 1515~1572)의 사상을 잇는 아메시우스(William Amesius, 1576~1633)였습니다. 그는 신학을 ‘선하게 사는 교리’(theologia doctrina bene vivendi est)라고 하여 신학을 학문으로 정의하기보다는 삶의 체계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신학은 전문가를 위해 유보된 영역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학문이라는 청교도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데, 만민을 위한 학문이란 말은 신학은 지성에게 말할 뿐 아니라 공통의 의식(sensus)인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직된 머리와 차가운 심장을 경계하라.’는 그의 경구는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체계로 존재하지 않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삶의 교리’였습니다.

과학은 증거에 의해 실증되어야, 실증된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하게 예측,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실증에 필요한 증거는 실험에 의해 항상 동일한 결과 도출하여야 하니 인문과학의 영역에 있는 신학도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물질만능, 과학만능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편리하게 하나 자연과 사람 배제는 경향이 강한 것이며 극단적인 인간 중심, 극단적인 인간 이기주의는 안 되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자기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확인을 통하여 시간적 흐름 속에서 존재의 정체를 밝히려는 역사의식에 준한 신학대학평가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

인구가 줄어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학령상황을 살펴주시고 모든 교육기관이 구조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정한 평가를 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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