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8-11(설교: 초등 학문에게 종노릇하…)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387
- 2025-06-14 12:31:21
너희에 대해 훅스타블(E. Huxtable)은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라고 하지만, 앞의 본문과의 관련성을 보아 그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때, 즉 복음을 듣고 믿기 이전 시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하였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본래적으로 종교성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자연히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다(롬 1:23, 25).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릴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창 1:28)을 생각할 때, 우상 숭배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죄는 전적으로 인간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 외에 자연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결과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설사 안다 해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므로 온갖 죄악과 타락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롬 1:24-32).
유대인들은 이러한 우상 숭배자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또한 우상들을 조롱하였다(사 44:9-20, 렘 10:1-16, 시 115:4-8, 솔로몬의 지혜서 13-15장). 그러나 유대인들 역시 율법주의라는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다. 즉, 실제로 하나님보다도 율법을 더 숭배하였다(10절, 사 29:13, 막 7:6-7, 7:8, 9, 13).
결국 바울은 모든 인간은 그들이 지배해야 할 피조물이나, 그들이 만든 발명품을 신들로 삼아 숭배함으로써 스스로 그 거짓 신들의 종노릇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상 숭배자들은 영적 및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또한 공포와 불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의 불행했던 상태를 상기시킨 바울은, 현재의 그들의 복된 상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원문에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거늘, 아니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로 강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S. J. Mikolaski)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요 1:18, 마 11:27).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감독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은혜롭고 친절한 아버지 곧 그들의 온갖 복(율법, 죄, 죽음,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의와 영생을 주심.)의 근원이 되시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지식이요 참된 신적 확신이다(M. L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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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하나님을 안 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J. Calvin, R. C. H. Lenski).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께 알려진 것이며(출 33:12, 17, 나 1:7, 요 10:27, 롬 8:28, 딤후 2:19), 그분의 은혜로운 관심의 대상(S. J. Mikolaski) 곧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란 그분의 자비로운 선택에 응답한 사람들, 즉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이 제시한 교제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R. T. Stamm).
우리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米田豊이 잘 설명하고 있다. “우주보다도 크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들을 마음에 두시고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로 알아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과분한 일이랴!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 큰 지식이 없고, 하나님께 알려져 있는 것 이상으로 큰 행복은 없다.”
그와 같이 지고의 복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일부가 그 복을 망각하고 다시금 초등 학문의 종노릇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라고 “슬픈 마음으로 비난한다”(J. Dow).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τὰ ἀσθενή καὶ πτωχὰ στοιχεία)은 “약하고 보잘것없는 초등 학문”(AV, RSV)이라는 뜻이다.
초등 학문(4:3의 주석을 보라.)이 약한 것은 율법이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J. Wesley, H. Huxtable, 黑崎幸吉).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인간이 범죄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또한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율법은 과거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할 힘을 보여 주지 못하고, 미래의 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길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율법의 근본적이며 고유한 약점은 언제나 질병을 진단은 하지만, 치료는 할 수 없었고 또 없다는 점이다.”
초등 학문이 보잘것없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영원한 유업을 줄 수 없기 때문인데(J. Wesley, 黑崎幸吉), 이 점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과 대조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초등 학문은 인간을 도울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을 더 약하고 더 비천하게 만드는 것이다”(M. Luther).
그런데 우상의 종노릇에서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πάλιν ἄνωθεν: ‘다시 새롭게’) 율법이라는 초등 학문의 종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바울은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설명한다.
날은 헤메라스(ἡμέρας)로서, 율법으로 정해진 날들인 안식일, 금식일, 유월절과 같은 절기의 날들, 그리고 새 달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참조: 롬 14:5, 6, 골 2:16).
달은 메나스(μήνας)로서, 매월 반복되는 월삭(사 66:23)과 중요한 절기로 지킨 달들, 즉 제1월이며 추수의 시작인 아빕월(출 13:4: 현재의 3, 4월), 제2월이며 꽃의 달인 시브월(왕상 6:1: 현재의 5월), 제7월이며 비로 강물이 넘치는 예다님월(왕상 8:2: 현재의 10월), 제8월이며 비의 달인 불월(왕상 6:38: 현재의 11월)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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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제7월(예다님월)은 유대력의 신년으로, 티즈리월이라고도 일컬어진 가장 신성한 달이었다.
절기(카이루스, καιρούς)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출 12:11, 레 23:4, 대하 8:13, 마 12:1, 엡 1:10)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해(에니아위투스, ἐνιαυτούς)는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과 50년마다 지키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희년만큼은 솔로몬 이후 지키지 않았다.
바울은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러한 율법의 조항을 삼가 지키니(파라테레이스테, παρατηρείσθε)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열심을 다해 엄격하게 그 율법을 지켰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黑崎幸吉). 물론 이들의 율법 준수의 태도는 도덕적인 규범(딤전 1:8)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입장 곧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마음 깊이 염려하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의 의와 영생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면, 여기의 수고한 것(케코피아카, κεκπίακα)이 현재 완료형이므로, 이제까지 전력을 기울인 모든 수고가 헛것으로 단정될까 보아 “너희를 위하여 두려워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말 속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헨리(M. Henry)나 렌스키(R. C. H. Lenski)의 말대로, 신앙을 훌륭하게 고백한 자들이 후에 신앙의 순결과 순박함에서 떠나 이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송흥국 목사는 “예정설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혹시 타락될지라도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나. 웨슬리는 한번 구원을 받은 자라도 다시 타락하여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가 만일 다시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①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타락과 멸망의 가능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의 멸망을 말하는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들 수 있으며,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마태복음 12:43-45, 누가복음 22:32, 사도행전 5:1-6, 디모데전서 5:15, 6:10, 히브리서 6:4-7, 10:26-27, 베드로후서 2:20, 22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금 초등 학문의 종노릇하려는 데 대해서, 그토록 염려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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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흥국, 요한 웨슬레(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5, 6판),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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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82-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