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독교대한감리회 영적 기상도를 본다.

오재영
  • 1607
  • 2024-07-27 22:26:01
위의 제목으로 6년 전(2018년 12월 13일 자 당당뉴스와 감게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18C, 미국 교회를 구한 사람으로 교회사에 인정받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사는 시대를 그리 평했다.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죄악(罪惡)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배우에게는 외운 대사까지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자신이 그 대사대로 살아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 그가 말한 대사(臺詞)는 무대의 막(幕)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도자(求道者)요 성직자(聖職者)를 비롯한 크리스천은 배우가 아니다. 이교도들에게 성도(聖徒)라 일컬어지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염려케 하는 사람들...

지금 우리와 공존하는 현장에는 각자의 신앙을 따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여러 종교들이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종교학에서는 수많은 종교를 고등 종교와 하등 종교로 구분한다. 그리고 구분하는 기준을 그들은 자기부인(自己否認)에 둔다. 즉 해당 종교에 자기 부인이 있으면 고등 종교로, 없으면 그 어떠한 희생과 열정에 상관없이 미신에 불과한 하등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정리한다. 이들이 기준으로 제시하는 자기부인(自己否認)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자기 욕망을 내려놓음을 말한다. 즉 자기가 믿는 종교가 표방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욕망이 부인 되고 있다면, 그는 고등 종교를, 자기 부인처럼 보이지만 그 모두가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 어떠한 형태와 관계없이 아무리 거대한 건물에 金색과 銀색을 칠하여도 그 종교는 하등 종교에 속하는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이처럼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존재하며 세대를 이어 영향을 끼치는 고등 종교에도 겪게 되는 위기가 있는데, 그 위기의 때에 예외 없이 나타나게 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그 현상 중 하나가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종교에 성직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고려 말 불교가 타락했을 때 온 고려 땅이 중(僧) 천지였음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도 종종 등장하는 티베트의 라마 불교의 타락 시에는 티베트 남자의 70%가 승려였으며, 가톨릭의 부패가 극심했을 때인 1830년대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 신부들이 넘쳐 남으로 그 당시의 똑똑한 유럽 청년들은 적(赤)과 흑(黑)을 놓고 고민을 했다. 즉 적(赤)은 가톨릭 사제의 붉은 성의를, 흑(黑)은 판사의 법복을 의미하므로 당시 유럽청년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성취함에 가톨릭 사제와 판사 중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되는지 저울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가 되어도 얼마든지 축첩(蓄妾)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성직자가 갑자기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종교에 책임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을 받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누리려는 욕망이 있다. 이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신의 욕망을 자기가 따르는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모든 것 내려놓고 희생하고 섬기는 자리에서 구도자(求道者)의 본을 보이며 산다는 것은 이론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그처럼 자기부인이 정당하게 요구되고, 바르게 행해지고 있다면 그 종교에 그러한 성직을 지망하는 이가 갑자기 급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단도 같은 위기인데, 우리의 미래의 희망이어야 할 신학교가 불편한 진실이지만, 자신들의 소명과는 상관없이 일반 대학 진학의 좁고도 좁은 과정을 피하여 좀 더 쉬운 상대로 신학대학을 지망한 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재철 , 비전의 사람, 참조)

시대의 풍랑에 방향 잃고 난파선(難破船)된 우리감리교회

역사는 반복되는가? 좋은 일 뿐 아니라 불행도 반복된다.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처한 오늘의 위기는 교조 존 웨슬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던 과거 18세기 영국 사회와 너무나 흡사하다. 무능한 국가의 지도자들, 삶에 절망한 서민들의 알 콜 중독, 아프리카의 흑인들에 대한 노예 사냥과 매매. 노예로 팔기 위한 인신납치. 빈민가 어린이들의 높은 유아사망률. 유흥을 위한 심한 동물 학대, 보편화된 놀음. 감옥의 잔혹한 규칙과 피비린내 나는 형법과 풍기 문란. 극장의 퇴폐적인 영업. 무법한 무정부상태. 외설적인 사회분위기. 정치의 부패와 공직자의 뇌물수수. 성직자의 오만과 횡포. 이신론(理神論)의 유행. 위선과 타락 등등이 그 당시의 영국사회에 대한 모습들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무려160여 가지의 죄목으로 범죄자들을 길거리에서 수시로 공개교수형에 처형하는 공포정치, 이처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형하는 죄목들 중에는 오늘날 경범죄에 해당하는 죄목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법들이 그 당시의 잃어버린 사회 질서와 도덕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더욱이 극심한 타락의 배경에는 그 당시 기독교가 국교이면서도 사회에 본을 보여야 할 고위 성직자들의 일탈된 행동들이 한몫을 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이 육적肉的, 명목상의 형식적인 교회 생활로 영적인 기류가 급랭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여우 사냥을 다니며 부유한 이들의 파티에 참석 하는 등, 사교 생활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찬과 예배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은 사라지고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가정 예배와 교리교육. 성경 읽기 등의 경건한 삶이 자취를 감추고, 야비하고 조잡한 언행이 교인들 가운데서도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참담한 현실들

영성이 희박하고 거룩함이 소멸되니 별 희한한 이들이 등장을 한다.
이제는 벌거벗고 춤추는 이들을 목사의 신분으로 축복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며 거대한 프랑카드 앞세우고 사진과 방송에 나타남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이다. 이들을 제재하고 바로잡아야 할 각 연회의 감독과 감독회장으로 선택을 기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더 황당하다. 옛말에 뭐( 犬)눈에는 뭐만 보인다 더니 이들은 교단의 성직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로 보이는 모양이다.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성직(聖職)에, 고위직(高位職), 하위직(下位職)이 있는가? 명심하라, 성직은 함부로 욕심 부려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다. 맡겨주시면 섬기고, 거부되면, 각자 부름 받은 위치에서 분수에 따라 섬기는 것이다.

지금, 당당의 뉴스대로 고발장 접수한 이들은 즉시 취하하고 기도하며 진행하라. 나의 생각은 벌거벗고 춤추는 이들을 축복권 이라도 있는 듯, 축복한 이들이나 같은 부류의 동급으로 본다. 그리고, 또 감독 회장이 되면 무얼 하려고? 당나라 황제처럼, 곤룡포 휘날리며 한껏 위세 부리려고? 지난 날 이어온 주변을 돌아보라. 그 자리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함부로 추구하다 교단에 폐를 끼치고, 자신과 가정이 얼마나 비참한 패가망신으로 끝났는지를... 모두가 엄위 앞에 ‘경거망동’ 함으로 사탄의 덫에 걸려 비명 횡사한 이들이다.

절망의 시대에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사람.

중세시대 교황을 비롯하여 성직자들과 추종자들의 온갖 부패와 타락으로 가톨릭이 허물어지고, 한편으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이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소수의 예수회 신부인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를 비롯한 일곱 명의 수사들이 주님 앞에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서약을 했다. 언제나 소명 있는 구도자라면 가슴 떨리는 서약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세계 어느 곳으로나 시체처럼 운반이 되고, 맹인의 지팡이가 되겠습니다...” 이들의 발자취가 암흑의 땅 조선에도 양화진의 새남터에 수 많은 피(血)를 뿌리고, 서강대학교를 세웠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목회자의 길은 자기 스스로의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죽는 곳에서는 신자들이 살고, 목회자가 사는 곳에서는 신자들이 죽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그 이유도 목회자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롤 모델인 사도바울의 고백이다.(고후4:12절).누구나 진리를 입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지만 그가 말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일은 매 순간, 피를 흘려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 않다. 반면에 진리에서 이탈 된 이들의 잘못된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진리를 선택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어야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글을 마치며...

우리가 두려워할 일이 있다. 같은 동포로 우리의 70여년전, 굶주림처럼 기아에서 허덕이는 북녘 땅 2 천만 동포들, 그중 일부 그리스도인들 의 눈물의 호소가 지금도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고민하는가?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 한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양육 된다. 책임을 맞고자 하는 이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주님께 받은 응답 확실하지 않으면 함부로 추태(醜態)들 부리지 말라. 성서를 인용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마음이나,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鬱憤)한자와 동행하지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질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는 말씀이 있다.

스티브 옥포드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란, 꿇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심장에 있다.”고 했다. 그 외의 정도를 벗어난 행태는 본인을 비롯한 관계된 모두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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