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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나(눅 10:29-37에 대한 곡해들)
최세창
- 1358
- 2020-07-08 21:20:36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로 영생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율법사는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고,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나를 사랑할 이웃도 되고, 내가 사랑할 이웃도 되는 모호한 질문이 아니라, ‘저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새 해석
유대인들은 동네 사람이나, 율법 준수자나, 동족을 이웃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까지 이웃으로 여겼고, 어떤 유대인들은 유대에 거주하는 이방인들까지 이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동족인데도 이웃이 아닌 원수로 여겨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가 망한 옛날에, 먼저 망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의 순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 이웃의 범위를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사답게 이웃을 율법 준수자들로 국한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제외한 동족만 이웃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웃관은 영생의 주이신 예수님의 이웃관과 달랐습니다.
율법사의 또 다른 문제는, 믿음의 행위인 사랑보다는 이웃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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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념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대해 김득중 님은, “대답이 불가능하며 또한 대답이 불필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확정지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히려 이웃을 찾아낸다.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의 대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이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이웃을 만들어 낸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사랑은 이웃을 만들거나, 이웃이 되는 방편입니다. 이웃이 소극적으로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적극적으로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해석은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유란, 여러 의미를 깨우치는 유비와 달리, 대개 한 가지 의미나 진리를 쉽게 깨닫도록 익숙한 이야기에 담는 표현법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틀리는 것입니다. 똑같은 곳에서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강도들을 사단의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리는 이유는, 사단은 사람을 삼키려고 성전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것은 민간요법이므로, 기름을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리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면 완치되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데나리온 둘을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돌아올 때를 재림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리는 것입니다. 재림 때는 최후 심판의 때이므로,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해도 주막 주인에게 갚을 상황이 아닙니다.
여러 해석이 틀리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 모든 해석이 틀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비유의 동기가 이웃이 누구냐고 하는 질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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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목적은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이웃관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나 실제로는 이웃이 아닌 사람들과 이웃이 아니나 실제로는 이웃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향해 24㎞의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거반 죽을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강도 중 강도는 살인강도이고, 간이 부은 강도는 남의 국가를 송두리째 강탈하는 전범들입니다.
학교와 직장, 사이비 종교와 각계각층에 떼강도처럼 약자에게 정신적‧신체적‧금전적 피해를 주거나, 생계와 실력 발휘의 터전인 직장을 떠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래로 강탈한 통치권으로 지위 고하를 안 가리는 대량 살상과 사유 재산 강탈과 임의 배분과 가족 살해를 하는 독재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평화는커녕, 고통과 신음과 죽음의 공포만 있습니다. 안 당하려면 개인은 힘을, 국가는 지력과 군사력과 경제력 등의 국력을 신장해야 합니다. 강도질하는 자들에게는 평화와 공생, 남의 자유와 인권, 정직과 훌륭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의 도움이 절실한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의 이웃이나, 실제로는 이웃이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 직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는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법적으로나 신분상으로 남들보다 더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이 절실한 피해자를 외면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유대인들을 매개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나,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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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웃이 아닌 무정한 자요 위선자요 겁쟁이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성전 관리자인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도 사랑이 절실한 피해자를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법적으로나 신분상으로는 가까운 이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웃이 아닌 무정한 자요 위선자요 겁쟁이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행할 기회를 날려 버렸고, 거반 죽게 된 사람의 마지막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고, 자기 신분을 욕되게 했습니다. 종교적 신분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교양이나 지식은, 인격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합쳐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없고, 영생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첨단 과학 시대에도, 영생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절실한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아니면서 이웃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으로 여기기는커녕, 원수로 여겨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여리고에 이르러,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까이 가서, 약용 음식물이기도 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 주면 돌아올 때에 더 든 비용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하루 숙박비가 12분의 1데나리온이었으므로, 지불한 두 데나리온은 며칠 동안 묵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마리아인은,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폴란드인 이레나 샌들러(Irena Sendler) 간호사는 2차 세계 대전 때, 30명의 여인들을 모아 ‘체고타’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서 2500명이 넘는 유대 아이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동료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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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목숨을 걸고,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유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비유대인 가정과 고아원과 수도원 같은 안전한 곳에 맡겨 새로운 신분으로 무사히 살아가게 했습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수감되고,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손발톱이 뽑혔는데도 동료들의 이름은 물론, 아무것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쓰레기장에 버렸지만, 기적적으로 동료들에게 구조되었습니다.
1999년에, 그녀의 영웅적인 행동이 ‘단지 속의 삶’(Life in a Jar)이라는 연극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200회 넘게 상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에는 그녀를 기리는 나무가 서 있고, 2007년에 폴란드 정부는 그녀에게 최고명예훈장을 추서했습니다.
97세에, 인터뷰에서, “부모님은 늘 누군가 물에 빠지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랑은 곤고한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언행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언행이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소유한 물질이나 힘, 지식이나 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3. 맺음말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으로 곤고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웃이란 소극적으로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적극적으로는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보다는,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나?’ 하는 물음입니다. 같은 민족, 같은 팀이라고 다 이웃은 아닙니다. 편파적이거나 부당한 처사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는 사람은 회개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원망스러운 동포나 원수라도 처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들이 바로 서도록 적합한 사랑을 하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의 성경 본문: 누가복음 10:29-37, 레위기 19:18)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