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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감각있는 사고와 판단/좋은 감리교회 조성실목사
장병선
- 1961
- 2020-07-10 01: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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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느냐 마느냐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과연 하나님은 예배를 원하시는가?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나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은 드리지 못하면서 형식적인 예배 행위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는가...중심이 아닌 명분만...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예배 가운데 중심으로 나아가 자신의 삶과 믿음과 존재 전부를 드리는 개개인들이 아닌가...
성전 문지방을 밟고 안 밟고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문지방만 밟는다고, 성전 안에서 예배 드렸다고 해서 그 예배가 더 거룩한 예배요 정성이 가득한 예배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다만 건강한 신앙은 개개인의 신앙적 결단과 거룩한 삶 이외에도 공동체를 통한 양육과 봉사와 선교를 요청하기에, 건강한 믿음과 건강한 교회를 말하려면 건물이 아닌 공동체성을 말해야 하는 것인데...예배만 드리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그 말은 진정한 신앙생활에 대한 도전이고 위협이며 교회의 존재 가치에 대한 폄하이다.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수 많은 병원이나 기업이나 기타 자영업들에 비해 특별히 믿을 수 없는 그룹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형평성의 차원에서 보면 교회는 신종 코로나 사태의 시국에서 행한 것 이상의 더 큰 누명을 뒤집어쓰고 부당한 제약을 당해야 하는 대상의 본보기처럼 유린당하고 있다.
예배 드리는 행위를 지켜내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만 드릴 수 있게 해주면 종교 탄압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 인식은 참으로 무지한 발상이다. 마치 학교는 공부만 가르치면 되니 모든 학교를 다 없애고 인강만 들으면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그렇게 단순한 일인가?
정중하게 협조를 구하고 끝까지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공복으로서의 모습이어도 될 만 한데 왜 명령하듯 그리고 벌금이라고 하는 겁주기의 형태로 메시지를 전하려 할까...
굴복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제압했을 때가 아니라 심정적으로 제압이 되어야만 완전한 것이다. 몸은 죽여도 정신을 죽이지 못하면 결국 역풍이 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극복해낸 것도 물리력 보다는 정신력의 승리인 것처럼 법이나 행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시행령 같은 것이 잠시 움츠러들게 위협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러서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저항감을 가지고 목숨 걸고 덤벼들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각 종교나 종파의 교단장들이나 지도자들을 불러서 간곡히 협력을 요청하는 모양새였다면 각 종교 또는 교단들 스스로 협력적인 자구책들을 더 열심히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물론 시기적으로 이렇게까지 어려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종교계의 그 누구도 조심만 하고 불똥이 튈까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만 했지 모범적인 모습으로 희생하려 하는 자세를 드러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각 교회나 교단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걱정하기 이전에 이 사회가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인지, 세상과 함께 하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예민해져있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와 협력과 극복을 위해 두손 두발 다 벗고 나서는 교회의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위기가 곧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그간의 불신과 조롱을 씻어낼 수 있는...
종교적 가치는 정치나 경제로는 논할 수 없는 독립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코로나 이전 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철저하게 세상에 속해있으며 세상 한 가운데 있는 존재로서 세상적인 가치 특히 도덕과 윤리와 공익이라고 하는 가치에 반할 수 없는 영역이 종교의 영역이다. 그러나 지금껏 세상의 언론으로부터 교회가 질타받은 영역 또한 그런 영역이고 극복해야 할 영역 또한 바로 그 지점이다. 정상적인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시민의식의 수준에서의 공감대 형성. 교인들에게 그것이 요청된다. 교회 문을 나서는 그 발걸음부터 그리스도인이며 동시에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는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식을 가지지 못한 신도들이 있는 종교나 종파나 교회는 몰락할 것이다.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의 선교는 여전히 그리고 주님 나라 임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할 뜨거운 사명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그리고 세상은 세상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 개혁자 보다는 치유자이며 선지자 보다는 이웃이며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대화가 통하는 상식이 통하는 그리스도를 요구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세상의 요청에도 완벽하게 응하시며 그 가운데 구원의 사역을 충분히 이루어가실 수 있다. 다만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만큼 세상에, 세상의 정서에 그리고 천심이라고 하는 민심과 떨어져 특별한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만의 나라에 살아가고 있기에 교회가 점점 더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코로나는 기회다.
자신은 예수를 따른다고 생각했으나 구약의 제사장들같이 여전히 형식적인 제사에 매몰되어있던 신앙의 한계를 새롭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발벗고 세상으로 나아가 그들과 소통하고 자신을 내어줌으로 세상과 하나되는 교회로 새로워질 기회다.
내가 알지 못하던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새롭게 변화되어 세상과 소통이 가능한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다.
소통이 곧 타협이거나 야합은 아니다.
눈높이를 맞추고 상식 선에서 대화하며 무엇보다도 논크리스천에 대한 존중감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인이다...성경적 진리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존재적 죄인인 것이지 먼저 신앙을 가진 성도들 앞에 범과를 가진 죄인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시답잖은 선민의식이나 우월감이 그들에게 얼마나 하찮게 보이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나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과 세상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친절하며 소통이 가능하며 협력이 가능한 교회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잘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세상은 교회를 핍박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이비처럼 보이는 집단을 싫어하는 것이다.
세상 누구도 자기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온전히 선한 사람이라고 자신하지 않는다. 그런데 변화된 삶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은혜 받았다고 말하고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서 저들 또한 의인은 아닐거라 생각하며 그들이 말하는 죄사함과 거듭남이라는 말에 대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가기를 주저한다. 변화된 것 없이 생각과 말만 변화되어 저렇게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며 자신도 살아가게 될까 염려하여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거짓말하며 살고 싶지는 않고 아는 대로 믿는 대로 옳은 삶을 살아가고 싶기에...
변화는 더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인 때가 왔다.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결정한 자의 몫이다. 영성을 퇴보시키지 않아야 하겠으나 동시에 이성적인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한다. 영성과 이성은 결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종교활동에 대한 규제안이 발표되어 여론이 분분해지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