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요한계시록] 4회 / 5회

엄재규
  • 1196
  • 2020-07-28 19:57:53
최 목사님 안녕하세요?
올리신 내용을 잘 보았으며 또 올리신 좋은 인용과 견해들을 통해 많이 공부했습니다. 저의 소견을 답글로 올립니다. 내용이 좀 많아서 이리했고, 혹여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된 동기에 대해서 성경은 스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을 주시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아래 학자들의 견해는 대부분 성경과 차이가 있고, 성경에 근거 하지 않은 가설 혹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저의 의견을 ‘☞’이하 밝힙니다. 학자들은 잘 모르는 일을 그럴싸하게 꾸며서 말하고, 낡은 old 성경에서 old한 언약을 버리고 항상 new가 옳다고 하면서 찾아다니고, 단순 명료한 일을 복잡스럽게 설명해 혼잡스럽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1.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계시록은 1세기경, 핍박받고 시달리는 성도들의 약해지려는 마음을 위로하고 굳게 하려는 데 그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
(저의 견해) ☞ Ⓡ① 위 계1:1~3과 22:6 에서 저술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그의 가정 및 추측에 의한 주장이고 역사적인 배경은 성경은 아닙니다. 저자가 저술의 목적을 책에서 이미 밝혔다면 후세에 어떤 학자가 이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장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2. 해리슨(E. F. Harrison)은 “계시록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로 가득한 신비스러운 책이다.
☞ 이런 견해가 요한계시록이 성도들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① 계시록은 종들이 읽고 복받으라고 종들에게 준 책이지 신비한 미스테리 북이 아닙니다.

3. 스웨테(Swete)는 “형식에 있어서는 묵시적 예언이 들어 있는 서신이고, 정신과 내적 목적에 있어서는 목회적이다.”
☞ 묵시와 계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이고, 나훔이나 하박국은 묵시에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나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합 1: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① (옵 1:1) 오바댜의 묵시라 (미 1: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성경에서 묵시라고 표명한 나훔, 하박국, 오바댜 그리고 미가와 같이 숨겨진 문서를 의미하고 이는 계시와 차이가 있습니다. 김득중은 “요한계시록은 다른 외경 묵시 문학을 인용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책은 묵시 문학이 아니라 예언 문학이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해서 분명히 계시와 묵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또, '목회적'이라는 그의 표현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4. 존슨(A. Johnson)은 “요한은 예언자로서 아시아의 성도들의 실패를 폭로해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갈라놓으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 아시아 성도들의 실패를 폭로해서? 일곱 교회들 가운데는 칭찬과 위로는 있으나 책망이 없는 교회들도 2개가 있습니다.
Ⓡ① 그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계시록을 논하면서 성경(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지도 않는 학자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서 계2:8~11 서머나 교회와 계3:7~13 필라델피아 교회의 경우는 실패하지 않은 교회들로써 징책이 없습니다.

5. 렌스키(R. C. H. Lenski)는 “계시록의 구성은 비극적인 희곡이 아니다. 계시록은 계속적인 승리의 예언이다. 즉, 절대적 승리가 그 끝이다.”
☞ 계시록은 계속적인 승리의 예언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의 준동, 대환란 등에서 실패도 함께 예언되어 있습니다.
Ⓡ① 그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에 실패한 수 많은 '음녀'와 '창녀'와 '하늘의 여왕'이 고스란히 등장합니다. (계 22:15) 【개들 dogs 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런 부류가 되지 않게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또 계6,8장; 봉인 심판, 계8~10장; 나팔심판, 계16장' 병-심판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실패도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개 dog'라고 부르는 어떤 인생도 있는데 이는 승리가 아닙니다. 혹시 개를 보고 도꾸, 메리, 쫑 한건 아니겠죠?

6. 黑崎幸吉은 “가장 필요한 수에 대해서 약술하면, ‘1’은 절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을 뜻하고, ‘2’는 증거 또는 증인에 관계되고, ‘3’은 삼위의 하나님, 거룩한 이름 삼창(三唱)과 같이 하늘을 이르는 수며, ‘4’는 동서남북, 흙, 물, 불, 바람과 같이 땅을 나타내고, ‘7’은 3과 4를 합친 것으로 완전을 나타내며,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는 수다. 또 ‘10’은 인간적 완전을 의미하고, 3과 4를 곱한 수인 ‘12’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열두 사도 및 새 예루살렘이 ‘12’의 수로 되어 있는 것 같이(21:12-21)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되어 있는 수다.”라고 하였다.
☞ 제 이해는 좀 다릅니다. 세부 내용 뿐 아니라 ‘2’는 분리의 숫자이고, ‘7’은 3과 4를 합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며 성결과 신성을 포함하며, 메노라 등, ‘10’은 인간적 완전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의미를 상징합니다.
Ⓡ① 그의 주장은 그리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를 정의를 다시하자면:
‘2’는 분리를 상징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롯의 두 딸, 롯을 이끌어낸 2천사, 두 개의 광명, 그리심산과 에발산, 복과 저주, 알곡과 가리지, 참목자와 거짓목자, 선과 악...
‘7’은 완전과 성결을 상징합니다. 창조의 7일, 일주일, 일곱 해 땅이 쉼을 얻고, 7x7은 환희의 해, 일곱 나팔, 메노라의 일곱 가지 등,
‘10’은 이방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10장에서 아라비아의 부족과 도시이름, 왕상 10:1~13, 15 스바의 여왕, 아라비아 조공, (창 16:4)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 였더라 (창 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12’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7.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계시록은 에베소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는 사실과 사데 교회는 이미 죽었으며, 라오디게아―네로 통치 시대에 지진으로 파괴된―는 재건되어 영적 풍요를 과시하고 있었으며(계 3:17), 요한은 밧모로 유배되었고, ―도미티안(주후 81-96) 치하의 흔한 핍박―교회는 그 핍박을 이미 견디어 왔으며(계 20:4),
☞ 사데 교회가 이미 죽은 게 아니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풍요가 아니라 영적 빈곤의 교회입니다. 시대와 적용에 대한 그의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성경은 항상 역사적 교리적 영적인 해석이 동시에 맞습니다.
Ⓡ① 그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시대의 대한 그의 역사적 적용의 사례도, 일곱 교회들에 대한 정의도 옳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는 위 주장대로 죽지 않았습니다.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① 라오디기아 교회는 위 주장과 반대로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8. 하르낙(Harnack)은 본서가 근거가 없는 여러 환상의 집합체이며, 단권의 책이 아니고, 여러 책의 부분적인 것들의 수집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읽고도 이해 못합니다.
Ⓡ① 저자는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습니다. (계 1:1b)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포드(J. M. Ford)도, 본서는 그들 외에 다른 한 사람이 편집한 것으로 매우 놀랍고 능란한 문학적 통일성이 있다고 하였다.
☞ 그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읽고도 이해 못합니다.
Ⓡ① 저자는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습니다. (계 1:1b)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10. 존슨(A. Johnson)은 한 사람의 저자가 쓴 것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에 대해 네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1) 이중의 표현, 즉 동일한 장면, 또는 환상이 두 번 기술되었다. (2) 이미 언급된 사람이나 사물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소개되었다. (3) 본문에서 절과 큰 단락이 잘못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4) 어떤 부분의 특이한 내용이 책의 다른 부분과 맞지 않는다. 이어서 그는 “어느 경우에나 다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의 대안들이 있다. 사실상, 본문 자체보다는 독자의 예상에서 문제점이 더 일어나고 있다.…우리는 현대와 서구의 사고방식으로 계시록의 내용이 바뀌는 곳마다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온전한 문서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저자의 본 의도를 발견할 가능성이 더 많아질 것이다.”
☞ 이게 바로 전형적인 학자들의 혼적 접근 방식입니다. 자기 논리를 먼저 세우고 성경을 읽으면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사야서의 저주가 내립니다. 그래서 쓰인 내용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①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는데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여러 학자들의 잘못된 접근 방식은 성경의 본문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이를 문장이나 단어로 쪼개고,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를 구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기술된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의 이견이 없음과 신약성경의 기록이 사도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과 요한 이라는 사람이 히브리에게는 세례요한 이전에 없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계 1:1b)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11. 해리슨(E. F. Harrison)은 “동일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논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본서의 상호 조화는 본서의 저작자의 단일성을 보여 준다.…중대 사건 시에 삽입된 사건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도 본서 전체의 일부분이다.…분명히 극적인 연속을 본서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독립된 문서들을 단순히 수집해서 본서가 되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다.”
☞ 저는 이 견해가 옳다고 봅니다.

12.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본서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견해들에 대해, “이러한 견해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본서는 잡동사니가 아니라, 극히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돈된 책이다.”
☞ 학자들 전부가 얼간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13. 존슨(A. Johnson)의 결론은 매우 탁월하다. “우리는 이 책이 어느 곳에서든지 한 사람의 저자가 기록했다고 기대할 수 있는 문학적‧개념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떤 어려운 해석상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이 책의 현존하는 사본들에서 볼 수 있는 생략이나 개찬이 있을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또 한 사람이 썼다는 견해가 요한이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계시를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구전이든 문서든 간에 여러 가지 자료를 사용한 일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1:2의 본문 해석을 참고하라). 그러나 원저자는 어디까지나 성령이므로 그 인도를 받은 요한은 어디서나 이런 자료들을 완전히 소화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기독교적 방향과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학자들 전부가 얼간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14. 內村鑑三은 “계시록의 목적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實際的)이다. 이것은 철학의 서(書)는 아니다. 또, 문예(文藝)의 서(書)는 아니다. 위자(慰藉)의 서(書)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한 글이다.”
☞ 무슨 아리송한 표현으로 글의 품격에서 점수를 따고 가려 하는데, 계시록은 스스로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이 내용과 다르다. 계시록은 철학이 아니고, 시편과 같은 시도 아니고, 눈물을 닦기 위한 책도 아닙니다.
Ⓡ① 학자들은 단순한 내용을 복잡하고 혼잡스럽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기록의 목적을 나타냈습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15. 內村鑑三은 “계시록을 놓치고서, 우리들은 성서중의 가장 좋은 부분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 제 생각과 같습니다. 누가 읽고 복 받는 책을 놓친다면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①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6. 김득중은 “요한계시록은 다른 외경 묵시 문학을 인용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책은 묵시 문학이 아니라 예언 문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 위의 사고가 일반적이지 않다. 모든 글은 문학이고 장르를 시와 산문, 창작과 사실 등으로 구분하는 게 좋고, 예언은 시로 표현되기도 하고 산문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별도의 문학이 아니다.
Ⓡ① 요한계시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책이고 표현이고 양식입니다. 구약 예언서로 부터 받은 영향을 받은 근거가 없고, 이에 대한 인과 관계도 불확실 하다.

17. 김철손은 “계시록의 문학 형식은 고대 예언 문학이나 후기 유대 랍비 문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이 본 환상과 계시를 토대로 하여 독창적으로 구성한 문학이기 때문에 일반 묵시 문학으로 간주해 버릴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제 생각과 같습니다.

마치는 말;
요한 계시록에서 성도들의 최후 승리와 적그리스도의 무저갱 패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 다음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스스로 경계하는게 꼭 필요합니다. 이는 소름이 돋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싹한 말씀입니다. (계 22:15) 개들 dogs 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위에서 인용된 학자들이 살아온 인생과 이름과 직위에 따르는 평판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며 그리 관심도 없고 저는 단지 그들의 주장이 정확하지 않아 보이기에 이에 대해서 제 견해를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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