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회복되는 감리교회와 유디트 그림

임재학
  • 1934
  • 2020-08-01 09:15:54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11-21년,
캔퍼스에 유채, 199×162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이 그림의 배경은 구약의 외경 '유디트서'의 이야기입니다.
유디트는 이스라엘 베투리아 마을의 젊은 과부로, 앗수르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침소에 들어가 그를 유혹해 술에 취하게 한 뒤 그 목을 잘라 돌아옴으로 유대인의 사기를 높이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합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진주성 촉성루 '논개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성서에서 조국을 구한 이 여성영웅을 그렸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바로크 회화의 시대를 연 천재화가 카라바조도 이미 십수 년 전에 이 주제로 그렸고(1598년경),
그의 친구였던 오라치오 젠텔레스키(1563-1639년)도 똑같은 주제를 1611년 경 그렸습니다.
하지만 남성 화가들의 작품을 들여다 보면 천하의 카라바조도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의 미술적인 테네브리즘 기법이나 완성도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합니다. 바로 유티트를 겁에 질린 소녀 같은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카라바조의 실수라기 보단 당시 남성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겁 많고 순진한' 시대적인 여성상이 작품에 반영된 것입니다.
시간이 되시면 세 작가(카라바조, 오라치오, 아르테미시아)들 각각의 작품을 검색해서 비교해서 보시면 정말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첨부파일은 카라바조의 유디트 작품입니다)

이 유디트 그림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고 성서의 교훈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유디트는 올바른 일을 행함에 있어 한 치의 흘들림도 없는 강한 의지가 돋보이며, 옆에 선 하녀 역시 적극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것으로 표현됐습니다.
두 여인은 이 무시무시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단호한 명분을 결의에 찬 당당한 표정을 통해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겪은 개인적인 아픔과 그 상처를 이겨낸 과정이 작품에 담겨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아버지 공방에서 그림수업을 받던 중 성폭행을 당해 법정 공방을 벌이다가 오히려 피해자가 더 비참해져버린 경험과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해도 피해여성을 오히려 비난했기에 함부로 말하지도 못했고, 법정에 가서도 피해자가 그 사실을 증명해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2차 가해가 일반적이었으며, 심지어 여성의 처녀성의 상실은 여성 개인의 아픔보다는 아버지의 재산권(초야권)이 손상되며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보는 말도 안되는 중세의 가부장적인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여성은 독립되고 존중받는 인격체가 아닌 가문의 일부분이나 소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지루하고 힘든 법정싸움을 벌이고 당당하게 승리합니다.
그래서 많은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에서 유디트의 냉정하고 결연한 표정을, 가해자인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지만 당당하게 일어선 여성으로서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까진 일반 미술사가들의 해석이라면, 기독교인의 해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아르테미시아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복수나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닌 인간(창1:27)의 회복입니다. 인간은 결코 소유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이며,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 중의 걸작이 바로 인간이며, 여기엔 남자나 여자나 동일하다고 하는 '인간존엄성'의 신학적 선언입니다.

19세기 이전의 서양미술사에서 여성 미술가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지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랜동안 여성들은 그림은 커녕 글을 배우기도 쉽지 않았고, 설사 그렸다고 해도 아버지나 형제 등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독보적인 여성 화가입니다.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도 놀랍지만 그 시대를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폭력이라는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없는 불행과 2차 가해의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선 화가이자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당당한 자유인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윤보환 직무대행님이 공대위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면담해서 이 문제를 호소하였고, 남연회 본부에 가서 역고발에 대한 답변서도 제출하고 왔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이젠 이 힘든 싸움을 그만두고 싶단 마음이 저뿐만 아니라 공대위에 속한 모든 이들의 솔직한 바램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제가 싸움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당하고 성폭행당한 감리교여성들의 아픔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말도 안되는 중세시대의 가부장적 질서와 논리였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상식이었고 질서였습니다.
혹여나 우리 감리교회의 모습이 나중에 돌아보면 그러하지 않은지. 아니 지금도 건강한 상식을 가진 일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자기만의 세계와 논리에 갇혀 있지 않은지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퇴계 이황도 인간이 타고난 본성인 4단을 말하면서 '수오지심'에서 '의로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 현재의 아픔은 '부끄러움'을 상실한데서 비롯 됐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 하나를 10여 년이 넘게 끌어오다 일반 방송에서 '자정능력을 상실' 했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오는 것이나,
여전히 문제를 바라볼 때 피해 여성들의 아픔이나 입장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바라보고 있기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잘못을 깨닫아야 '죄'임을 인식하고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껴야 '회개'하며
스스로 정화하고 개선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의인'(칭의)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유디트의 그림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놓치지 않고 꼭 봐야만 될 작품으로 꼽을만큼 인기 있으며 미술사의 명작입니다.
하지만 이 성화는 또다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아픔당한 여인들을 결코 외면하지 말고, 위로하고 품으며 억울함을 해결하라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회복하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 공동체 안에도 이루어지라고 준엄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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