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0회 : 2. 인사(1:6-7) ※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재림?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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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4 05:20:0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또 하나의 결과에 대해, 요한은 【6】[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며(22:3, 엡 1:6),① 모든 구원 섭리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요 3:16, 갈 4:4-7).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영화된 은유나, 죽을 운명인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기원”(A. Clarke) 또는 “예수님의 신성”(R. Earle)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슨(S. E. Johnson)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유대 문학과 대조적으로 메시아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하였다.}(막 1:1의 주석).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와 성도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이시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②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③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④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엡 1:3의 주석)라고 하였다.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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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에베소서 1:6의 주석을 보라.
2) 저자의 요한복음 1:1의 주석을 보라.
3) 저자의 골로새서 1:15의 주석을 보라.
4) 저자의 히브리서 1: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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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라고 하였다.}(요일 1:2의 주석).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βασιλείαν, ἱερείς)으로 삼으신]에 대해, 왕국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것이라는 설⑤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것이라는 설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 곧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점(엡 2:19, 빌 3:20, 골 1:13)과 [삼으신]이라는 표현과 다음 내용으로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라고 하였다. 이 구절과 본문의 배경으로 출애굽기 19:6의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특수한 의미의 제사장들이나 주님의 제자들을 부정하거나, 또는 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출애굽기 19:6의 말씀도 당시의 특수한 의미의 제사장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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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 Wesley, H. Alford, J. A. Bengel, A. Clarke, F. B. Clogg, R. Brooks, W. M. Smith, W. Barclay, J. F. Walvoord, A. Johnson, R. H. Charles, M. Rist, R. H. Mounce, P. E. Hughes, 黑崎幸吉, 이상근, 김철손, 요한계시록.
6) A. Barnes, M. Henry, C. L. Morris, R. C. H. Lenski, W. M. Kroll, W. Hendriksen, R. Tuck., H. Kraft, “Beckwith”(in 박윤선), G. E. Ladd,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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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왕 됨에 대해, 요한은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5:10. 참조: 20:6, 22:5)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나라의 왕으로 즉위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사랑과 진리와 의와 자유 등으로 왕 노릇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제사장 됨에 대해, 래드(G. E. Ladd)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와 예배와 하나님께 대한 찬양 등의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롬 12:1, 히 13:5, 벧전 2:5). 이 구절은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교회는 새롭고 참된 이스라엘로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특권들을 유업으로 받고 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요’(사 61:6).”라고 하였다.
黑崎幸吉은 “신교의 만인제사주의가 이것이다. 크리스천은 딴 제사장의 주선이 없이 하나님을 뵙고 이를 섬길 수 있다(히 10:19-22).”라고 하였다. {블럼(E. A. Blum)은 “만인사제직의 진리는 종교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재발견되었고, 다시금 강조되었다. 만인사제직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만인사제직은 그리스도인이 봉사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인사제직은 각 그리스도인이 설교나 가르침의 공적인 선물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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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만인사제직이란 그리스도인들을 먹이고(요 21:15, 17) 치며(요 21:16),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명(엡 4:12)을 부여받은 특별한 사제들인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등(엡 4:11)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벧전 2:5의 주석). 만인사제직이란 모든 교인들이 세상에 대해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의 [영광](독사, δόξα)은 {바울 서신에 75번 나타난다. 이 말은 관련되기는 하지만,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므로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유익하다. 명사는 동사 도케오(δοκέω)와 관련되며, 의견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Ⅳ Macc. 5:18). 나아가서 이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견해 곧 ‘칭찬’, ‘찬양’, ‘명예’, ‘경의’를 뜻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흔한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Kābhōdh는 ‘무게’, ‘무거움’, ‘짐’(사 22:24)이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으며, 여기서부터 ‘물질’, ‘부’, ‘존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31:1). 나중에 ‘빛남’, ‘광휘’, ‘광채’, ‘훌륭함’의 요소가 물질의 의미에 덧붙여졌다. 이와 같이 그 말은 여호와의 임재에 관한 찬란한 물질적 명백성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16:7, 사 6:1-5).
바울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1) 피조물 또는 그에 속한 것에 부여된 ‘찬양’이나 ‘영예’이며, 그 반대말은 ‘욕됨’(고후 6:8) 또는 ‘부끄러움’(빌 3:19)이다. (2) 하나님께 돌리는 ‘숭배’나 ‘경의’(롬 3:7, 23, 4:20, 11:36, 고전 10:31 등)이다. (3) 어떤 사람에게 명예나 영예를 돌리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높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다(고전 11:7, 15, 고후 8:23, 살전 2:20). (4) ‘외적인 빛남’, ‘광채’, ‘찬란함’, ‘광휘’이다(고전 15:40, 41). (5) 하나님께서 빛나는 구름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롬 9:4). (6) 하나님(롬 1:23, 고후 4:6) 또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탁월성, 절대적 완전, 왕적 존엄이나 장엄이다(고후 3:18, 4:4, 딛 2:13, 살후 1:9). (7)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롬 6:4)이다. (8) 하나님과 접촉하거나 접촉해 온 자들을 둘러싼 빛이다(고후 3:7). (9) 그리스도께서 이미 들어가셨고, 또한 신자가 들어갈 복된 나라나 장소이다(롬 8:18, 딤전 3:16). (10) 인간 혹은 사물의 탁월함이다(고전 15:43, 고후 3:10, 엡 1:6, 14, 18, 빌 3:21, 4:19)}(빌 1:1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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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은 크라토스(κράτος)이며, 하나님께 적용되어 ‘정복하는 힘’이나 ‘통치력’을 의미한다(5:13, 엡 1:19, 딤전 6:16, 벧전 4:11, 5:11, 유 25).
[세세토록](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τών αἰώνων)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뜻으로 ‘영원성’을 의미한다(1:18, 4:9, 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아멘](ἀμήν)은 {‘견고하다’, ‘신실하다’를 뜻하는 히브리 어원에서 온 말이다(P. E. Hughes)}(고후 1:20의 주석).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서약’, ‘진술’, ‘선언’ 등을 확인할 때 사용했는데(민 5:22, 왕상 1:36, 렘 28:6), 그것이 예배 때에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회중의 응답으로 발전한 것이다(시 106:48, 느 8:6, Ⅱ 에스드라서 15:13, 18:6, 계 5:14, 7:12, 19:4). 또, 보통 문장의 서두에서 ‘진실로’, ‘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으로, 그리고 찬양 등의 끝에 기원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3:14).
{쇠트겐(Schoettgen)은 이 말이 얼마나 미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축복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에게는 낙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멘’을 짧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짧게 될 것이다. 반면에, ‘아멘’을 분명하게 길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길게 될 것이다.”}(고전 14:16의 주석).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언급한 요한은 그분의 미래에 대해, 【7】[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였다.
[볼지어다]는 이두(ἰδοὺ)이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나 화자가 알리거나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이다. 또한, 감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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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니엘 7:13-14을 배경 삼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확증하신 바이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참조: 행 1:11, 살전 4:17),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승용물이기도 하므로(출 16:10, 19:9, 24:15, 16, 33:9, 레 16:2, 민 11:25, 시 97:2, 사 19:1),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천상적이며 신적인 존재로서 재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초림 때와 달리, 초자연적 사건인 재림 때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는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찌른 자들(참조: 슥 12:10, 요 19:34, 20:26, 27)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도⑦ 재림하시는 모습을 볼 것이라는 뜻이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회개하고 믿지 않은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재림 주의 심판 때문에 애곡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하리라](나이, ναί: 헬라어) 아멘(ἀμήν: 히브리어 ???의 헬라어 음역)은 동의어의 반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⑧
재림을 의미하는 주된 용어는 다음과 같다.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쓴 것을 벗기다’, 또는 ‘벌거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주님의 재림이란 모든 것을 벌거벗겨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라는 것이다(고전 1:7, 살후 1:7, 벧전 1:7, 13,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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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 Barnes, A. Plummer, W. Hendriksen, A. Johnson, “Miligan”(in 이상근), G. E. Ladd, 박윤선, 이상근, 비교: R. H. Mounce, P. E. Hughes: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사람.
8) C. L. Morris, R. H. Mounce, “Greijdanus”(in 박윤선), 박윤선,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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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전 15:23, 마 24:3, 27, 37, 39,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이 말의 통속적인 뜻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거나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전문적인 용어로 군대에 의해 나라가 침략 당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또, 특별히 왕이나 행정 장관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곳을 방문하는 일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예수님의 재림 곧 파루시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상에의 침입과 백성의 궁극적인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W. Barclay).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는 신이 예배드리는 자에게 현현하는 것에 쓰였고, 또 황제의 즉위식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이 말이 그리스도께 적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나 하나님을 반역하거나 모독하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W. Barclay).}(고전 1:7의 주석).
신약성경의 재림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에 속한 문제로(마 24:36, 막 13:12, 행 1:7), 밤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을 때에 임하신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순간에는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모두가 알게끔 오신다(마 24:27, 37, 39, 살전 5:2, 벧후 3:10).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위엄과 영광 그리고 대 격변의 사건이며(살전 4:16), 성도들이 함께 강림한다(고전 15:23, 살전 3:13). 또한, 재림 사건은 마지막 심판(롬 1:8, 2:2-10, 3:6)과 모든 것의 완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최후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이미 주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므로, 영원한 형벌의 심판이 면제될 뿐 아니라(롬 5:9-11) 완전한 영광의 생명을 얻는다(고전 15:53).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기서의 모든 삶이 그 자신에게 진노를 쌓는 것이므로, 마지막 형벌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롬 2:5).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어두운 비밀들이 밝혀지고, 마음의 뜻과 동기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고전 4:5). 마지막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갑작스런 파멸이며 진노요 저주이다(살전 1:10, 5:3, 9, 살후 2:10-12). 이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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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은 파멸하게 된다(고전 15:24, 살후 2:8).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실질적인 힘을 상실한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하게 될 것이다(고전 15:24-28).
반면에, 성도들은 신령한 몸(골 3:4, 롬 8:23, 빌 3:21, 고전 15:42-44)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죄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8:18-21).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본격화 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만물을 지배한 그리스도도 아버지께 복종하게 된다(고전 15:24-28).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1)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벧전 4:7), 주님을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마 24:36-51, 벧전 4:7, 살전 3:13, 5:23, 롬 13:11-14). (2) 인간적인 생각으로 재림이 아무리 지연되는 것 같더라도 실망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데(벧후 3:4), 이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과 같은 관념을 갖지 않으시기(벧후 3:8) 때문이다. (3) 그 날에 우리는 사랑의 친교 중에 발견되도록 해야 한다(벧전 4:8-9, 고전 16:14, 22). (4) 그 날을 위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요일 2:28).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의 올바른 자세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모든 일과 의무를 주님 안에서 더욱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67-73.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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