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교회 J목사를 공격하면 모두 의인들인가?

오재영
  • 2667
  • 2020-08-15 21:14:03
왜, 이글을 쓰는가?

전에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설교준비모임에 가기위해 큰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왕복 8차선의 횡단보도 신호에 따라 앞에 서있던 1톤짜리 과일행상차가 좌회전을 하기위해 출발을 하였다. 언뜻 보니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때 자전거전용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든 이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다가 앞차와 부딪쳐 넘어졌다. 가벼운 접촉사고였기에 지나쳤으나 과일 행상하는 그 부부가 마음에 걸려 오전에 경찰서에 신분을 밝히고 물어보았다.

예상대로 그 자전거 탄 이는 자기는 잘못이 없고 트럭의 과실이라며 치료비와 자기자전거를 변상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본 대로 말하고 필요하면 말하겠으니 그 과일행상의 부부에게 연락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전화번호를 말하였는데, 그 후에 경찰이 연락을 전하지 않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몇 주 전, 주말에 과거 교단의 부실한 부분을 구실로 한동안 교단 안팎의 관심을 끌었든 이가 열락을 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전 본부에서 초대받아 진행하려던 토론회가 무산된데 대하여 분개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고발상태로 지금도 조사 중이라 했다. 그래서 L,교회와 J목사에 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대로 前, 後임자와의 갈등에 관하여 지나온 과정의 몇 가지와 현재의 상태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회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대답은 “그것까지는 나는 잘 모르겠고, 지금...” 사실은 그것이 팩트(fact)인데, 그 내용을 배제하고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들을 하는가? 지금 교단의 공적공간에 등장하여 목소리높이는 이들 중에도 혹여 이런 목사들은 없는가?

사역의 길을 지낸 후 돌아보면 대부분 세상적인 신념을 信仰으로 포장하려한 나의 미성숙한 自我를 허물어뜨리시려는 섭리로, 내게 그들을 회초리와, 배신자의 배역으로 세우셨음을 깨닫고 아픈 마음으로 엎드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돌아보면, 어렵고 힘들었던 때는 모두가 내가 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도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타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기성찰에 힘씀이 당연함에도 자신의 선입견과 열등감으로 분수를 넘어 선동과 울분(鬱憤)에 매여 냉소적인 시선으로 은혜의 시간을 소비함은 두려운 일이 아닌가?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세상의 그 어떤 도적보다 마귀는 훨씬 더 무섭다. 세상도적은 재물의 손해로 끝이 나지만, 마귀의 덫에 걸려들면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엾은 이들이다.

얼마 전에는 근 1년 만에 전국 여선교회장께서 카톡 으로 웨슬리안타임즈에 실린 자신의 인터뷰기사를 보내왔다. 자신들이 "공대위"를 조직하여 L교회의 J목사를 고발하고 그 일이 심사 중임에도 본부에 모여 토론하겠다는 자신들을 반대하고 항의하는 L교인들에게 이들은 모두가 잘못된 이들이고 불의한 이들이다... 이제 자신은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끝으로 지금, 본인이 원해서 이일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모두가 솔직해지고 정직하기를 바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이다.” 그런 말이 있다. “정죄는 부분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고, 사랑은 전체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이분도 갈등의 원인부터 물어보면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할 것인가?

1년 전, 깊은 내용도 모르면서 회자되는 각종 음해성 추문에 정죄의 글을 써 붙인 피켓들을 수백 장씩 들고 여선교회회관과 미래의 목회자가 될 감신강당에서 기도한다며 난리치고, 성명서를 동네방네 향하여 목소리 높여 매스컴에 등장시키든 이가 또다시 말을 바꾸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오늘의 교단의 추락한 위상을 높이는 구도자의 자세들인가? 오늘 우리시대에 필요한사람은 우리가 처한 불신앙의 모든罪와 허물을 본인의 책임으로 가슴에 안고 죄를 향한 주님의 진노 앞에서 자신을 드리는 시대의 중보자(仲保者)다(겔4장). 다른 이들도 선동에 ‘부화뇌동’이 아닌, 자신은 구설과 관계없이 求道者의 무리로 서있는지를 각자가 엄위 앞에서 점검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영성(靈性,spirituality)점검에 힘써야...

牧師로서 자기 영향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함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비극이다. 그러나 자기 목양지도 제대로 감당하기도 힘든때에 남의 사역에 개입함은 더욱 초라한 인생이 아닌가? 흔히 남을 많이 비판하는 사람치고 자기 삶을 진지하게 이어가는 이들 많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이들은 정서적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비판하면 순간적이나마 자기가 잘 나가는 사람과 동급이라는 착각에 빠지므로 집착한다. 오히려 그를 비판하니까 그들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약에 취하는 것처럼 비판에 취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 지금 L교회가 크던 작던 6.700여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는 아니다. 하물며 구설에 휘둘리는 교회가?

연회의 1천여 명의 목사 중에 40여명의 목사들이 그 연회를 대표하는가? 하나같이 선(線)을 넘은 가련한 모습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목소리 큰 자들이 옳다고 윽박지르면 정의(正義)가 되는 시대, 여전히 갈 길이 보이지 않는 건 모두가 이 같은 사람들이 선두에 서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罪” 그것은 바로 교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구나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는 빨리 간파하지만 자기 자신에게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그 죄에 대해 C.S루이스는 놀라운 표현으로 “그 죄란 우리의 인생을 자기중심적으로 설계할 때 생기는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다...”했다.

BC 593년경 느부갓네살 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바벨론 그발강가 에 전쟁포로 신세가 되어 옮겨진 유대인들은 그 절망가운데서 하나님께 그렇게 부르짖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의 진실한 참회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신탁(神託)이 회개할 것, 즉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 그리고 그들의 이웃들에게 그들의 희망은 단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있음을 보여줄 것을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회개와 함께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사탄이 끊임없이 주시함을 잊고 자기성찰에 게으르면 그는 혹이 납작해진 낙타처럼 불행한 목사들 된다. 자신의 혹에는 영양분이 전혀 저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막연하게 영적사막을 통과하리라는 착각 속에 세월을 보내노라면 머지않아 결과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며 믿음과 평안도 잃어버린 채 절망과 함께 생명까지 잃어 초라한 생을 마칠 것이다. 냉정함으로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도 여전히 모닥불에 불나방 뛰어들 듯 객기부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는가? 이들은 지금, 目的, 方法, 모두가 성경중심이 아닌 세속적방법과 술수뿐이다. 성경에 그리하라 기록이 되어있는가?

글을 마치며...

신앙인들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광야에서 목이 타는 사람의 눈에 신기루가 보이듯 위기의 순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둔 이들에게는 그가 어떠한 고난의 환경이든지 믿음에 따른 마음과 태도에 따라 고난 중에라도 이전보다 더 큰 위로를 받는다. 신앙이 아닌 신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공감 얻기 쉽지 않으나 지금 팬데믹(pandemic)의 위기상황 속에서 목사 된 우리에게 흔들 수 있는 깃발과, 외칠 수 있는 구호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가? 받은바 분명치 않으면 엎드려 조용함이 바른 자세다.(예레미야애가1장~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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