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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막을 건너갈 때
백승학
- 1309
- 2020-08-20 13:22:51
백 승 학
오래 전,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배려로 따라 나섰던 해외여행에서 하루 종일 사막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카이로(Cairo)에서 에일랏(Eilat)으로 넘어가는 어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네게브(Negev)사막의 어느 한 켠이었을 것이다. 싯딤나무가 드문드문 나타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사막여우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섭씨 40도는 넉넉히 넘을 듯이 느껴지는 사막의 무더위에 서서히 지쳐갈 무렵 우리 일행은 그리 크지 않은 동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때 이처럼 모래로 뒤덮인 단조로운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도 이렇게 기쁜데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이라는 곳에서 종려나무 70그루와 맑은 샘물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충분히 실감이 갔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동굴 역시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겉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널찍한 동굴 내부에서는 어디선지 모르게 천연의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길 하나가 동굴 입구를 향하여 작은 도랑을 이루며 흘러나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불과 수백 미터 앞에는 아카바해의 쪽빛 물결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뜨겁고 거친 사막에 이토록 아름다운 위로가 숨어 있을 수 있다니! 그것은 분명 사막과도 같은 인생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위로와 나로서는 너무나 닮아있었다.
그동안의 나는 어린 시절부터의 삶이나 조금은 늦은 나이에 시작한 목회 모두 다 현실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사막과도 다름이 없었다. 춥거나, 혹은 덥거나, 다 보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날 사막에서 만난 저 경이로운 동굴처럼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 마지않던 소중하고 그립고 아름다운 기억 또한 누구보다 많았다. 나의 그늘진 표정 뒤에 감추어진 넓고 깊은 삶에의 환희와 감격의 징표들을 가까이서 들여다 본 자라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일들 중에 비교적 근간에 겪었던 하나는 아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보기에 따라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적용에 관한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 대학의 건축공학과를 다니던 아들이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입사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 중에는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꼭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회사도 있었다. 4년 내내 두 세팀 씩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해외연수나 해외 유수한 대학으로의 교환 학생 같은 특별한 스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겨우 학점관리 정도로 만족하며 졸업을 하게 된 아들이 그 회사의 최종면접까지 갔을 때 나는 아들이 너무 대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3배수로 뽑힌 최종 면접자들이 세 명씩 한 팀이 되어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통계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한 팀 당 한 명씩 합격하는 구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상기된 마음으로 최종면접을 보고 돌아온 아들이 내게 말했다.
“아빠! 큰일났어! 우리 조에 편성된 세 명의 최종 면접자 중에 내 왼쪽은 서울대이고 오른쪽은 유학파야!”
나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서 태연함을 가장한 채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를 안 닮아서 잘 생기고 착하고 잘난 내 아들아! 여기까지 온 것만도 너무 장하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서울대를 이긴다는 것은 아빠가 볼 때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구나. 유학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말이다!”
아들도 나도 어깨가 축 처지고 침울해졌다. 그러나 나는 곧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막에도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 하시면 혹시 하실 수 있지 않을까?”
그때 혹시라는 말은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그 셋 중에 우리 아이가 합격을 하여 여태껏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 아들이 신입 사원 연수 때 찾아보니 서울대와 유학파가 진짜로 보이지 않더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내게 말해 줄 때 나는 “네가 떨어졌어야 걱정이지 그 둘은 아빠가 보기에 다른 곳에 합격을 할 가능성이 네가 떨어졌을 경우보다 비교도 안 되게 많지 않을까?”하고 속으로만 말하며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목사답지 못한 말로 아들에게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사실 그 어간에 나는 나의 경제적 형편이 어렵다는 말을 제 3자로부터 들었다며 어떤 분이 나를 호출한 뒤 내게 작은 업무 하나를 맡겼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에 한차례 겪었던 그와의 질기고 아픈 연유로부터 화해할 수 있는 기회인 것도 같아서 기꺼이 일을 맡겠다고 하였다. 그가 내게 맡겨준 업무의 분야는 다행히, 아니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종류였고 별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일 년 쯤 걸려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실제 업무량은 3개월 치가 채 안되는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그의 스케줄에 맞추느라 이럭저럭 1년이 걸린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종의 선에서 그가 맡겨준 업무를 마감하고 돌아온 이튿 날, 그가 인편으로 내게 봉투를 전해왔다. 봉투 속에는 50만원이 들어있었다. 언뜻 드는 생각이 그 50만원이란 그가 마땅히 내게 지불할 만하다고 판단한 액수이며 또한 내가 일한 만큼의 가치를 나타내는 액수임이 분명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이후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나로서는 더욱 더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손발에서 맥이 빠지는 증상이 지속되었고 때론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를 원망하려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도, 또한 진심도 아니다. 피차간에 업무와 관련한 무슨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의 판단과 결정 속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나 기준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지금 나는 하필이면 그 우울하고 눈물 나던 어간의 끝에 경험하게 된 아들의 취업 과정이 내게 남겨준 의미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삶에서 의미라는 어휘보다 더 든든하고 믿음직한 어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그 뒤늦은 시절에 내게 다가와 준 의미, 즉 하나님이 내가 언젠가 네게브(Negev)사막에서 만났던 그 숨겨진 동굴처럼 시원하고 따듯한 위로를 내 인생의 거칠고 황량하기 그지없던 사막에서 기꺼이 건네시던 의미를 누구에겐가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날도 나는 그저 까닭없이 예배당 앞 좌석에서 울고 있었는데 내 뒤에 언제 온 줄도 모르게 다가온 아들이 "아빠! 내가 지금 무슨 전화 받았는지 알아? 먼저 번에 최종 면접 본 그 회사, 아빠가 하나님이 하시면 될 수도 있다고 말한 그 회사에서 1월 첫주부터 출근하래!"하고 말의 내용에 비해서는 너무 작고 평온한 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전에 사막에서 마주했던 동굴 속 바람처럼 시원하면서도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였다.
누군가는 광야가 좋아서 광야로 나갔다며
제 스스로 말하여도
나는 깊어진 상처 숨기려고 나갔지
섭씨 오십 몇 도의 모래 속에 종일 상처를 묻고
상처와 함께 죽으려고 나갔지
돌아보면 누려본 적 없는 삶에
사랑 밖에는 아무런 아쉬움 없었지만
광야 외로운 샘 곁 종려나무 그늘에 누워
사랑했노라!
가난했지만 사랑했노라! 울고 있을 때
그 소리 주님께 닿아서
버선발로 뛰어오셨지
눈물 닦아 주셨지
그 후로 나는 사랑했던 이들 곁에서
골방 구석에는 남모르는 샘을 파고
하늘로 난 작은 창가에는 푸른 종려나무를 심었지
사랑했노라!
가난했지만 사랑했노라! 울 때마다
버선발로 오시는 주님의 발
눈물로 씻기며 살아왔지. (백승학 시집 ‘사월의 꽃잎’ 중에서)
출처)
https://facebook.com/seunghaak.ba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