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교회

최천호
  • 1433
  • 2020-08-21 20:03:58
*본 글은 스스로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감정을 내려놓기 위하여 쓴다. 어떤 선구자적 발상에서 계몽하거나, 특정 대상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성경에 정통한 신학자나 은사가 있는 영성 가도 아니기에, 사람의 눈으로 평범한 회사원의 눈으로 본 상황을 정리한다.
(아래 글은 어릴 때부터 한 번도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현재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청년이 현재의 교회를 바라보고 쓴 글이다.)

제일교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6:18
어려서 다닌 교회학교에서 성경퀴즈 시간이 되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손을 높이 들었다. 성경은 역사가 많고, 역사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그래서 성경퀴즈 시간은 내가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 알아요.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부모님이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 교회학교를 인도하시던 어머니는 손을 높이 든 나에게 한두 번은 기쁜 마음으로 칭찬과 함께 달란트를 내 손에 쥐어주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잠16:18을 말씀 하시며, 높게 치켜 올린 내 손을 애써 무시했다.
그 시간이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상을 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성경 내용을 전달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경험 이후 나에게 잠언 말씀은 귓가에 항상 울리는 문장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영어 듣기 평가에서 1~10번까지 잘 들린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 이번 시험 잘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이 머리에 울리며, 갑자기 넘어짐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 교만하면 시험 망치는데' 그럼 당연하게도 그 뒤에 문제는 집중이 안 되고 잘 안 들리게 된다.
잠언 말씀이 안 떠오르도록 노력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개인적인 집중력과 마인드 컨트롤 문제였겠지만, 돌이켜보아도 시험문제 풀이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밖의 삶에 관심이 많고 교만해지기 쉬운 성격인 나에게 이 말씀은 언제나 적당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 주었다.
수상, 칭찬, 아부의 순간에도 영어 듣기 평가 시간처럼 잠언 말씀이 떠오르며, 교만해지려는 마음을 숨 고르게 했다. 지금도 취침 전 침대 위에서 드리는 기도의 시작은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이다.

8월 15일, 광복절이자 내 생일이기도 한 이날은 1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다. 광복절에 태어난 것이 괜히 영광스럽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휴일임에 감사한다. 하지만, 올해는 전국적인 코로나-19 재유행이 시작되며, 바이러스로 얼룩졌다.
이 재유행에 시작점에 “ㅁㅁ 제일교회”가 2곳이나 있어, 연일 복통을 유발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다. 나를 키워준 세계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또 살아갈 세계를 공격하는 모양새이다.

우리나라에는 “제일교회”가 참 많다. 도(道), 도시, 동과 같은 행정구역은 물론, 사랑, 은혜, 소망, 믿음 등 기독교 가치를 보여주는 단어 뒤에도 “제일”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제일(第一)”을 사전에서는, “여럿 가운데서 첫째가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제일이라는 것은 “여럿 가운데”에서 알 수 있듯이 비교우의며, 상대적인 평가다. 그러니 제일이 되고 싶은 대상들은 그 비교군을 변경하고, 새롭게 한다. “당신이 그 부분에서는 제일일지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내가 제일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제일, 즉 1등이 되고 싶은 건,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과 직결되는 “자격”과도 같은 것이다. 제일모직, 제일기획 등 기업들도 이 단어를 선호한다.
하지만, 왜 예수의 몸이라는 교회마저, 서로와 경쟁하며 비교적, 상대적 우위를 점하려 할까? 나는 이를 시스템에서 찾고 있지만, 이는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볼 예정이며, 우선은 감정적으로 “교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실제로 어느 한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 그리고 가장 오래된 교회 중 “제일”이 붙어 있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그 교회의 연혁을 살펴보면, 개화기 선교사를 통한 개척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당시 선교사님들은 '제일'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두셨을까? “The Best”였을까? “The First”였을까? “일등이었을까? 일번이었을까?” 나는 후자였으리라 생각한다. “첫 번째 세운 교회, 그리고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2 교회, 제3 교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개신교의 개혁대상이었던 가톨릭에서는 제2 성당에서 제5 성당까지 찾아볼 수 있음에도 개신교에는 제일만 있다.
“제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교만이 없었다면 또는 체계화된 시스템이 있었다면 제2 교회, 제3 교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최고가 되고 싶다는 개척자의 포부 또는 그렇게 만들어 주시리라 믿는다는 믿음으로 포장된 교만과 이미 세워져 있는 교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앞에 “제일”을 붙이게 했다. 성경퀴즈 시간에 가장 높게 손을 들던 나처럼, 높게 손을 든 것이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는 순위 전쟁에 익숙한 수험생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기업가처럼 모두와 경쟁을 한다. 타종교는 물론이고, 같은 개신교, 같은 교단까지도 경쟁의 대상자다.
그 결과, 세계 최대 교회도 각 종파별 최대 교회도 한국에 있는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욕심에는 끝이 없다. 손에 쥔 달란트(복)는 잊은 채 다시 더 얻으려고 손을 높이, 더 높이 든다.
대한민국 최고의 종교가 되고 싶다. 그 수를 늘려 정치적 실력 행사를 하고 싶다. 이미 경험한바 있는 정치권력 핵심에 개신교인을 세우고 싶다.
대통령 자리에 기독교인을 세워본 이 경험이 독처럼 치명적이다. “제일 종교”교만은 한국의 교육과 문화 경제성장의 근거를 개신교에서 찾는다. 아니, 개신교에서만 찾는다. 우리의 덕이라고 외친다.
과거 선배들이 값없이 나눔을 위해 뿌린 씨앗을 추수하다 못해, 돌려 달라고 찾아다닌다.
미래세대를 위해 뿌리지 못하고, 우리나라 GDP의 절반이 건설경기였던 시절답게 교회 건물 건축에만 열을 올렸다. 그리고 이 사리사욕을 말씀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했다.

지금까지도 정치와 연결된 이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 앞선다. 아니 그 위에 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이미 다 알고 있고, 보좌를 딱 잡고 있으며, 생사까지 논한다.
“내가 다 했어! 내가 아니면 안 돼, 우리가 해야 해, 내가 맞고 너는 틀렸어!”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교만하다.”고 평한다.

하나님은 이미 정답을 맞혀 상으로 받은 달란트를 손에 가득 쥔 자에게 정답을 외칠 기회를 더 주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이유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높아지기 위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낮아지지 못하던 “제일”교회에게 “제2의 신천지”라는 천박한 이름이 따라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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